<장은수의 지식카페>모든 대륙 품고 신화·설화 녹여내.. '천일야화' 잉태한 '세계의 중심'
■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③ 바그다드, 셰에라자드의 도시
천 하룻밤 동안 이어지는 사랑·질투·다툼·환상…시시한 삶에도 무시 못할 모험·신비 있다는 것 보여줘
200여년 걸쳐 페르시아·인도 등 주요 문헌 아랍어로 번역… 민족·종교 넘어선 정신성의 보편적 질서 일궈내
서양사에는 암흑기가 있다. 그러나 세계사에는 암흑이 없다. 게르만족이 로마를 정복한 476년 이후 1000년 동안 유라시아 곳곳에는 대도시들이 번성하면서 중세 황금기가 열렸다. 당나라 장안에서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이어진 실크로드에는 사마르칸트, 부하라 등이 있었고, 광저우(廣州)에서 출발해 동남아와 인도를 거쳐 아랍에 이르는 항로 곳곳에는 거대 항구 도시가 생겨났다. 모든 바닷길이 모이는 곳은 ‘평화의 도시(Madinat-As-Salam)’라 불리는 아바스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였다.
762년 아바스 왕조의 두 번째 칼리프 알 만수르는 티그리스강 서안에 새로운 수도 건설을 지시했다. 총 10만 명을 동원해 767년 완성된 바그다드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잇는 수많은 운하로 둘러싸인 ‘물의 도시’였다. 운하는 주변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동시에 바다로부터 만국의 물자를 들여오는 제국의 젖줄이었다. 제국의 기틀을 놓은 알 만수르, ‘천일야화’에 자주 등장하는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 ‘지혜의 집’을 세워 번역과 연구를 통해 학문을 진흥한 알 마문에 이르는 약 80년은 ‘신이 건설한 도시’ 바그다드의 전성기였다.
땅과 강과 바다의 모든 것이 바그다드로 향했다. 동북쪽 호라산 문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동남쪽 바스라 문은 티그리스강을 통해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서북쪽 다마스쿠스 문은 시리아를 지나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연안 도시로, 서남쪽 쿠파 문은 아라비아반도를 가로질러 메카로 이어졌다. 아랍의 문인 알 자히즈는 말했다. “바그다드보다 더 뛰어나고 고귀한 도시, 더 넓은 관문과 더 튼튼한 성벽을 갖춘 도시는 없도다.”
작은 문명은 ‘우리 것’에 집착하지만, 큰 문명은 주변의 선진 문명을 흡수하고 융합해 만인의 질서를 창조한 후 성립된다. 학문을 우대하고 과학을 존중하며 예술을 지원하는 아바스 왕조의 정책에 따라 학자, 번역자, 의사, 시인, 장인 등이 구름처럼 몰려들면서, 바그다드는 전 세계 지성과 문화의 중심이 됐다. 제국 창업 이후 무려 200년 동안 지속된 번역 운동을 통해 전 세계 주요 문헌을 번역함으로써 아바스 왕조는 아랍어에 정신적 깊이와 문화적 품위를 부여하고 수학·의학·천문학 등을 고도로 발전시켜 모두가 수용할 만한 보편적 질서, 즉 아랍 문명을 창조해냈다.
또한 중앙아시아에서 아프리카 북부에 이르는 아랍 세계 내부는 물론이고 중국·인도·동남아·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서 온 상인들이 수크(suq·시장)를 가득 채웠다. 신앙을 갖고 움마(Ummah·이슬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면 신분도, 출신도, 민족도, 국적도 상관없이 평등하게 대하는 이슬람 특유의 관용성과 상업을 진흥하려고 거래에 세금을 걷지 않는 제국의 정책이 합쳐지면서 경제적 번영의 토대가 됐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순식간에 100만 명을 훌쩍 넘겼다.
도시는 금세 티그리스강 동쪽으로 확장됐고, 두 곳은 유명한 배다리로 연결됐다. ‘이븐 바투타 여행기’는 전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밤낮으로 다리를 거닐며 쉼 없이 산책을 즐긴다.” 바그다드에서는 세상 모든 것을 값싼 가격에 얻을 수 있었다. ‘천일야화-짐꾼과 세 자매’에는 처녀가 짐꾼을 데리고 시장 보는 장면이 나온다. 처녀는 술집에서 좋은 포도주 한 병을 산 후, 과일 가게에서 “시리아 사과, 오스만 모과, 오만 복숭아, 나일강 오이 등”을, 푸줏간에서 “양고기”를, 식료품점에서 “말린 과일, 티하마 건포도 등”을, 과자점에서 “파이, 튀김, 레몬 빵, 사탕 등”을, 향료 가게에서 “수련 화장수, 용연향, 사향, 알렉산드리아 양초 등”을 사들인다. 처녀의 평일 쇼핑 목록에는 전 세계에서 온 물건들이 가득하다.
유명한 수전노들의 이야기를 모은 ‘수전노’에서 풍자 문학의 대가 알 자히드는 바그다드에 만연했던 사치와 향락을 경고한다. “두 가지 붉음이 남자를 죽인다. 하나는 고기, 하나는 포도주다. 두 가지 붉음이 여자를 죽인다. 하나는 금, 하나는 사프란이다.”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즐기며, 금으로 몸을 치장하고 사프란으로 어여쁘게 장식한 음식을 먹는 삶은 바그다드의 넘치는 부를 보여준다. 빛이 있으면 그늘도 따르는 법. 엄청난 빈부격차와 만연한 차별을 견디다 못해 한 시인은 울분을 토했다. “바그다드, 부자에겐 호화저택, 빈자에겐 궁핍한 오막살이/거리를 걸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니, 나는 이교도 집에서 버림받은 경전이구나.”
문명의 융합은 책에서만 생겨나지 않았다. 마차길 중심의 로마가 ‘도로의 도시’라면, 낙타 길 중심의 바그다드는 ‘골목의 도시’였다. 효율 높은 사막 운송 수단인 낙타가 다닐 수 있으면 됐기에 바그다드는 점차 좁은 골목들이 엉킨 거미줄처럼 증식하는 미궁으로 변해 갔다. 골목은 다양한 인간을 만나게 하고, 일상적 모방과 융합을 일으켜 창조의 놀라운 원천이 된다. 그 골목길에서 인도와 페르시아, 아랍과 이집트 등에서 전해 온 풍속과 설화, 신화가 모이고 합쳐져 거대한 이야기 바다를 이뤘다. ‘천일야화’였다.
‘천일야화’의 원형은 7세기 사산 페르시아에서 인도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천 가지 이야기’다. 8세기 중엽, 이 설화들이 아랍으로 들어오고, 수백 년 동안 아랍 내부로 구전되는 와중에 수많은 이야기가 첨삭되면서 진화를 거듭한 끝에 현재 같은 모습이 됐다. ‘천일야화’는 겉 이야기 안에 속 이야기가 있고, 속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격자 구조’로 이뤄졌다. 이야기의 무한한 연쇄는 아무리 시시해 보이는 삶일지라도 들여다보면 경탄할 만한 모험과 샘솟는 신비가 감춰져 있음을 보여준다. 세상의 그 어떤 삶도 무의미하지 않다. 무시하거나 경멸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말라.
가장 바깥 이야기는 왕비 셰에라자드와 술탄 샤흐리아르의 이야기다. 아내의 부정을 목격한 후 지독한 의처증에 걸린 샤흐리아르는 새 왕비를 맞이해 하룻밤이 지나면 살해하는 만행을 세 해 동안 이어간다. 쾌락의 밤이 지나면 죽음의 아침이 오는 전도된 세계는 일상이 무너져서 미래(아이)를 낳지 못하는 무질서를 암시한다. 스스로 왕과 결혼한 셰에라자드는 새벽 무렵 “언니가 아는 재미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들려달라는 동생 두냐자드의 청을 받아들여 이야기의 문을 열어젖힌다.
‘상인과 마신’으로 시작된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는 절정 직전에서 멈추거나 더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는 말로 끝나고, 다음이 궁금해진 남편은 그녀의 죽음을 하루하루 유예한다. 천일 밤 동안 지속된 270편에는 애정과 질투, 우애와 암투, 거래와 기만, 모험과 환상, 기지와 지혜 등 인간의 모든 삶이 생생히 담겨 있다. 동서양 교역로를 떠돌면서 돈과 보물, 관능과 쾌락을 찾아 나서는 상인들과 모험가들, 이들과 사랑을 나누는 지혜롭고 매력적인 여성들에게서 독자들은 반드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놀랍게도 신드바드, 알라딘, 알리바바 이야기는 본래 ‘천일야화’가 아니다. 이 이야기들은 ‘천일야화’를 서양에 처음 소개한 앙투안 갈랑이 덧붙여 넣은 게 거의 확실하다.
인간은 모두 셰에라자드다. 달콤한 하룻밤 같은 인생이 지나면 누구나 죽음의 심판 앞에 불려간다. ‘천일야화’는 필멸의 존재인 인간에게 ‘불멸의 비밀’을 알려준다. 짤막한 인생을 던져 영원히 이어질 이야기를 빚어낼 수 있다면 인간은 절대 죽지 않는다. 셰에라자드 이야기가 이어지는 밤은 이름 없이 살해당한 숱한 여성의 넋을 달래는 위령의 시간이자 세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생산의 시간이며, 무능과 무력을 이기지 못하고 세계를 재난에 빠뜨린 남성이 여성의 언어를 통해 소생하는 치유의 시간이자 구원의 촉매로서 두냐자드의 기지와 용기가 발현되는 자매애의 시간이다.
바그다드는 500년 동안 융성하면서 아랍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1258년 ‘파멸의 날’이 찾아왔다. 몽골 군대가 쳐들어와 바그다드를 무자비하게 정복하고 파괴와 약탈을 저지른 것이다. 시민 수십만 명이 학살당하고 건물은 불타올랐다. 이븐 아우스는 한 편의 시로 바그다드의 부음을 전했다. “세월의 풍상에 허물어진 참경에 슬피 우노라/티그리스강은 전화에 휩싸여도 불길만 잡히면 곳곳이 우아했건만/이젠 찬란했던 과거로 돌아가려 한들, 바라는 마음엔 실망만이 자리하네.” 아랍의 중심은 이후 이집트 카이로로 옮겨졌고, 바그다드의 영광은 빠르게 사람들 기억 속에서 멀어졌다.
문학평론가
■ 번역 운동
아랍과 유럽은 ‘번역 운동’을 통해 만들어졌다
749년에서 1258년까지 약 500년 동안 아바스 제국은 중앙아시아에서 아프리카 북부까지 광대한 영토를 지배함으로써 ‘아랍’의 정체성을 창출했다. 아랍은 ‘번역’을 통해 만들어졌다. 수메르 이래의 유구한 문명 유산과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바탕 삼고, 무려 200년에 걸쳐 사회 전체 역량을 동원해 페르시아·인도·그리스·로마 등의 주요 문헌을 아랍어로 번역함으로써 민족·종족·종교를 뛰어넘어 만민을 포괄할 수 있는 정신성(보편적 질서)을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 12세기 무렵부터 유럽에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로마법대전 등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을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옮기는 ‘번역 운동’을 통해 아랍 문명의 성취를 유럽으로 가져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역사적 운동의 출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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