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대투쟁' 이후 30년, 노동 현실은 달라졌나?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동조합은 허용할 수 없다!"
"그러면 당신의 눈에 흙을 넣어주겠다!"
자신이 죽기 전에는 노조는 있을 수 없다는 정주영 현대그룹 '왕회장'의 배수진에도 불구하고, 1987년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했다. 이어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회사 측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노조 결성을 위한 투쟁에 들어갔다. '한국 역사상 최대의 노동자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설적인 '87년 노동자대투쟁('7·8월 노동자 대투쟁'이라고도 부른다)'이 시작된 것이다.
긴 침묵과 일시적인 폭발.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긴 침묵과 또 한 차례의 폭발. 한국 현대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이 같이 말할 수 있다. 일제의 강압에 침묵했던 민초들은 해방 공간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강압에 침묵했던 민초들은 4‧19로 폭발했다가 5‧16과 함께 다시 침묵해야 했다. 다시 1980년 봄 폭발했지만, 전두환의 광주학살 이후 침묵하다가 1987년 6월 항쟁으로 폭발해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우리의 노동운동도 비슷하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19세기 말 서구 제국주의와 일본의 압박에 의해 목포항을 개항한 지 석 달 뒤인 1898년 2월 부두 노동자들이 첫 파업을 벌인 뒤 정치적 상황에 따라 긴 침묵과 일시적인 폭발을 반복해 왔다. 1929년 3개월 동안 계속된 원산 총파업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억압에 침묵해야 했다.
하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해방이 되자 전평(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과 경영자가 사라진 일본 기업들을 노동자들이 스스로 관리하는 자주관리 운동으로 폭발했다('손호철의 발자국' 16. '전남 화순탄광' <한국일보> 2020년 11월 21일자 참조).
하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탄압,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의 노동운동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침잠할 수밖에 없었다. 노조가 존재했지만 이는 '어용노조'로, 이승만 시대에는 이승만 하야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87년 6월 항쟁 때에는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에도 불구하고 유신 헌법과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체육관에서 뽑는 체육관 선거를 유지하겠다는 전두환의 호헌 선언에 지지선언을 할 정도였다.
이 같은 침잠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중요한 정치적 변동이 있을 때마다 억눌린 삶의 요구를 치열한 투쟁으로 분출했다. 4‧19 혁명 직후 노동운동의 폭발은 5‧16 쿠데타에 의해 다시 억눌렸지만 1970년 전태일 분신과 월남을 다녀온 한진노동자들의 대한항공 빌딩 방화 투쟁 등으로 폭발했다. 박정희는 유신으로 이를 압살했지만 박정희가 쓰러지고 80년 봄이 찾아오자 노동운동은 탄광 노동자들의 사북 항쟁 등으로 다시 폭발한다. 전두환의 광주 학살 이후 노동운동은 다른 사회운동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적 공간이 열리자, 그동안 축적된 노동운동의 역량에 노동자 대중의 엄청난 열기가 결합되어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폭발한 것이다. 울산, 특히 그 전까지 노동조합이 없었던 재벌 기업에서 시작된 노동자들의 대투쟁은 (주)통일 등 마산‧창원의 대기업으로 확대됐다. 8월 중순에는 현대그룹 소속사들 노조들의 모임인 현대그룹노조연합 노동자 수 만 명이 시위를 벌이면서 울산시가 해방구로 변하고 말았다. 울산 동구 방어진 뒷산으로 올라가자, 87년 노동자대투쟁의 한 축이었던 현대중공업이 한 눈에 들어와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처럼 시작된 노동운동은 이후 영남 지역 전역으로, 이어 9월에는 수도권과 비제조업 중소기업으로까지 확대되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이 석 달 동안에 1987년 한 해 동안의 전체 노동쟁의의 90%인 3341건의 쟁의가 발생했다. 특히 이 투쟁의 정점이었던 8월 중순에는 하루 평균 80건 이상의 투쟁이 일어났다. 대투쟁의 전체 참가자 수는 122만 명으로, 당시 10인 이상 사업장의 노동자 수가 333만 명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이들 중 3명의 1명 이상이 투쟁에 참여했다는 이야기이다.
과거의 소규모 봉제공장이 아니라, 노동운동하면 떠오르는 거대한 골리앗을 이용한 골리앗 투쟁이 등장한 것은 1990년이다. 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는 골리앗 투쟁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단초는 나타났다. 전태일 분신이 있었던 1970년대에 비해 노동자 계급은 양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했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변화했다.
70년대의 노동자 계급은 기본적으로 회사 측이 '똥물'을 투척한 동일방직, 박정희 정권 몰락의 단초가 된 YH사건 등 영웅적인 투쟁을 이끈 봉제, 가발과 같은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분야 중소기업의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이었다. 87년의 노동자 계급은 중화학공업화에 따라 국가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전략적 힘을 가진 기간산업의 숙련직 남성노동자들이 대거 성장했고 이들이 투쟁을 촉발시켰다. 이들은 3년 뒤 골리앗 투쟁을 주도했다.
이 노동자대투쟁은 전국적으로 투쟁을 지휘할 지휘 조직의 부재로 인한 분산적 투쟁이라는 한계에 정부의 공권력 투입과 (중산층과 노동자계급의) 분리 통치 전략, 이에 따른 안정희구적인 중산층의 비판적 여론 등으로 외형적으로는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주목할 것은 이 투쟁 이후 노동자와 같은 기층민중 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의 분열이 본격화됐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1989년 몇몇 경제학자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시민단체라고 할 수 있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출범했다. 언론은 온건한 목표에 온건한 합법투쟁을 기본 틀로 하는 시민운동의 등장을 칭찬하며 노동운동 등의 민중운동을 비판하고 고립시키려 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에 주목할 또 다른 특징은 투쟁 방식은 기업과 정부의 공권력에 저항해 투쟁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전투적이었지만, 그 목표는 온건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요구사항에서 사회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정당 건설이나 노동자 권력 창출과 같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치적인 목표도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저임금 개선, 생존권 보장, 노동시간 단축 등의 경제적 요구나 노동3권 보장, 노동악법 개정 등이 주요 요구사항이었다. 이후 한국 민주노동운동의 기본 골격이 된 '전투적 조합주의(투쟁 방식은 전투적이되 목표는 경제적 이익에 집중하는)'가 만들어진 것은 이때라고 하겠다.
다행히 이 투쟁은 해빙기에 있었던 이전의 투쟁들과 달리 짧은 폭발기로 끝나지는 않았다. 이는 4‧19 혁명 이후나 1980년 봄과 달리 전면적인 정치적 반동이 찾아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 정권이 승리하고 이어 일정하게 정치적 반동화가 이루어졌지만, 과거와 같은 독재 체제가 아니라 '민주화 속에서의 반동화'였기 때문에 노동운동은 합법적 공간에서 계속 진화해 나갔다.
1987년 말 현재 노동조합수가 1년 전에 비해 50%나 늘어났다. 나아가 일시적인 폭발 후 정치적 반동화에 따라 긴 어둠으로 들어가야 했던 이전의 노동운동과 달리, 87년 항쟁은 그 결과로 전국적인 조직이자 민주노총의 모태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제는 극우 정치인으로 변한 김문수와 진보정당을 위해 싸워온 노회찬, 심상정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은 학생운동 출신으로 한 때 사회 변혁을 위해 노동 현장에 위장 취업한 노동운동가들, 즉 '학출(학생운동출신의 준말)'이었다는 점이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이들 학출들이 서서히 노동운동의 2선으로 물러나고, 단병호 전민주노총위원장으로 상징되는 '노출(현장노동자 출신)'이 노동운동의 지도자로 등장하게 된다.
'울산노동역사관 1987'이라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 나섰다. 내비게이션이 알려 주는 대로 따라가니 멋진 웅장한 건물이 나타났다. 헌데 역사관은 찾을 수 없었다. 근처를 몇 바퀴 돌다가 역사관으로 전화를 했더니 내가 본 근사한 빌딩의 4층으로 올라오면 된다는 것이다. 역사관이라고 해서 자체 건물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더니, 오토벨리지원센터라는 빌딩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노동운동의 메카 울산에서조차도 독자적인 역사관을 못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슬퍼졌다. 하긴 노동운동의 중심인 민주노총조차도 자체 건물을 갖지 못할 정도로 물질적 기반이 취약한 것을 생각하니, 자체 역사관을 기대한 것부터가 너무나 현실을 모르는 나만의 착각이었다.
역사관은 내부 공사 중으로 어수선했지만 노동운동의 귀중한 자료들을 보고 있자, 87년 노동자대투쟁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을 생각하자 씁쓸하기만 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이 벌써 30년이 넘어섰지만, 생계를 위해 작업장으로 출근한 노동자 중 일곱 명 씩이 매일 싸늘한 죽음으로 변해 집으로 돌아오는 현실을 생각할 때, 우리의 노동 현실은 그동안 과연 얼마나 발전한 것일까?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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