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로' LG·SK 극적 합의로 배터리 파국 면했다
합의 급물살 배경은 미국의 압박과 적극적인 중재
중국 CATL 맹추격·폭스바겐 배터리 독립 선언 등 위기감도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됐다. 막판까지 진흙탕 싸움을 벌이던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3년째 끌어온 배터리 분쟁에서 대승적인 합의로 마침표를 찍었다.
이번 합의를 통해 SK이노베이션은 현재 가치 기준 2조원(현금 1조원+로열티 1조원)을 LG에너지솔루션에 지급하기로 했다. 영업비밀 침해 소송 관련 합의금 규모로 역대 최대 금액이다. 이와 함께 양사는 국내외 쟁송을 모두 취하하고 향후 10년간 추가 쟁송도 하지 않기로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시한을 코앞에 두고 배터리 분쟁에 대한 전격 합의에 성공한 것이다.
LG는 투자 재원 확보, SK는 미국 사업 불확실성 해소
4월 11일 김종현 LG에너지솔루션 사장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은 공동 입장문을 통해 “한·미 양국 전기차 배터리 산업의 발전을 위해 건전한 경쟁과 우호적인 협력을 하기로 했다. 특히 미국 바이든 정부가 추진하는 배터리 공급망 강화 및 이를 통한 친환경 정책에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난 주말 서울에 있는 김종현 사장과 미국에 체류 중인 김준 사장이 화상회의를 통해 전격 합의를 이끌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주기 어려웠던 미 행정부의 적극적인 중재가 양사 합의를 끌어낸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9년 4월 LG에너지솔루션은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 2월 10일 ITC는 SK이노베이션이 LG에너지솔루션의 영업비밀을 침해했다고 최종 판결했다. ITC는 SK이노베이션에 배터리 부품·소재에 대해 10년 동안 미국 내 수입금지 명령을 내렸다. SK이노베이션의 고객사인 포드와 폭스바겐 일부 차종에 대해서는 각각 4년과 2년의 유예 기간을 뒀다.
ITC 최종 판결을 뒤집기 위해서는 양사가 합의해야만 했다. 하지만 LG에너지솔루션은 배상금 3조원 이상을 요구했고 SK이노베이션은 1조원 수준을 제시하면서 양사의 배상금 격차가 커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 때문에 SK이노베이션은 바이든 거부권 행사 요구에 총력을 기울였고 LG에너지솔루션은 거부권 방어에 주력해왔다.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던 미국, 명분과 실리 챙겨
이번 합의는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시한을 하루 앞둔 4월 11일(현지 시간) 극적으로 이뤄졌다. ITC 최종 결정일로부터 60일 이내인 미 대통령 거부권 행사 시한은 한국 시간으로 4월 12일 오후 1시까지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양사의 극적 합의로 거부권 결정 없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게 됐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분쟁은 바이든 대통령의 딜레마였다. SK이노베이션이 미국 조지아주에 짓고 있는 배터리 공장은 지역 경제 활성화와 현지 주민 2600여명의 고용이 약속된 친환경 일자리가 달린 사안이었다.
조지아주는 정치적으로도 상징성이 큰 지역이다. 조지아주는 전통적으로 공화당 텃밭이었으나 2020년 말 대선 때 ‘스윙 스테이트’(경합주)로 부상했다. 조지아주 유권자들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에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24년 만에 승리했고 상원 선거에서도 2석을 모두 민주당이 차지할 수 있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SK이노베이션에 유리한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그동안 미국이 중국과의 무역 분쟁에서 지식재산권 보호를 강조해온 정책 기조에 상충되는 곤란한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극적 합의로 마무리된 상황을 미국도 반기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내고 “공약이었던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계획’의 핵심은 미래의 전기차와 배터리를 미 전역에서, 미국 노동자들이 만드는 것이었다”면서 “이번 배터리 분쟁 합의는 미국 노동자와 자동차 산업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이어 “세계적으로 수요가 증가하는 전기차 및 관련 부품 공급과 미국 내 고임금 일자리 창출 및 미래 일자리 기틀 마련을 위한 강력하고 다각적이며 탄력적인 미국 기반의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이 필요하다”면서 “오늘 합의는 그 방향에 맞는 긍정적인 걸음”이라고 말했다.
중국 CATL 추격 허용 ‘상처뿐인 영광’ 비판도
경쟁사인 중국 CATL의 맹추격과 폭스바겐의 배터리 독립 선언 등에 따른 위기감도 양사가 극적 합의에 도달하게 된 주요 배경으로 꼽힌다. 양사가 3년간 많은 비용을 치르며 소송전을 벌이는 동안 경쟁사인 중국 배터리업체들은 고속성장 중인 전기차 시장의 과실을 상당수 차지했다. 결과적으로는 중국 CATL이 점유율을 늘려 K 배터리를 치고 올라올 기회를 제공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양사 소송전으로 CATL은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물량을 대거 수주하며 올해 초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SNE 리서치에 따르면 전 세계 배터리 사용량에서 CATL은 전년 동기 대비 272.1% 늘어난 8.0GWh를 기록했다. 시장 점유율도 17.3%에서 31.7%로 상승했다. CATL 뿐만 아니라 BYD, 궈시안 등 다른 중국 배터리 업체들도 저가 공세와 공격적인 설비 투자로 고객사와 발주 물량을 늘려가며 K배터리를 추격하고 있다. 현대차도 최근 아이오닉 신규 발주 물량을 중국 CATL에 맡겼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지난 1월 “양사가 싸우면 남 좋은 일 시키는 것”이라며 조속한 합의를 촉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양사의 진흙탕 소송전은 글로벌 1위 완성차 업체인 폭스바겐의 배터리 독립 선언이라는 나비효과도 불러왔다. 3월 15일 폭스바겐은 ‘파워데이’를 열고 전기차사업 중장기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기존 파우치형 배터리에서 각형 배터리로 전환하겠다고 폭탄 선언을 했다. 폭스바겐에 파우치형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던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은 이날 주가가 급락하기도 했다.
전고체 배터리 등 차세대 배터리 기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연구·개발에 투자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양사가 소송전에 매달리면서 쏟아부은 소송 비용은 최대 1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비영리 연구기관인 CRP(Center for Responsive Politics)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 측은 2020년까지 로비에 65만 달러를, LG에너지솔루션 측은 53만여 달러를 투입했다. 로펌 비용 등을 포함해 올해도 많은 소송 비용을 투입했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합의를 통해 양사가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크다는 것이 업계 중론이다. 양사 모두 소송 장기화에 따른 부담을 털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미국은 친환경 정책 기조의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유럽에 이어 최대 전기차 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미국 사업 불확실성이 해소되면서 3조원을 투입한 조지아 1·2공장 건설은 물론 폭스바겐·포드에 배터리 납품도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게 됐다.
LG에너지솔루션의 미국 사업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GM과 합작해 2조7000억원을 들여 35GWh의 ‘얼티엄셀즈’를 짓고 있다. 2025년까지 총 5조원을 투자해 연 145GWh의 배터리 생산능력을 확보할 예정이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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