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크와 동년배, 세종은 가장 아름다운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이기환의 Hi-story]
[경향신문]
얼마전에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국내에서는 전해지지 않는 15세기 금속활자본을 일본 도쿄(東京) 와세대대(早稻田大) 도서관에서 찾아냈다는 소식이 들렸는데요. <이학지남>(吏學指南)이라는 책은 중국 원나라 때인 1301년에 편찬한 법률·제도 용어집이자 관리 지침서랍니다.
그러나 저는 <이학지남>이라는 책 자체에는 그리 관심이 없구요. 이 책이 1420년(세종 2년) 제작된 ‘경자자(庚子字)’라는 금속활자로 만들었다는 것에 눈길이 쏠렸습니다.
■신료들은 왜 금속활자를 반대했을까
1420년이라면 어떻습니까. 최초의 금속활자본이 <직지>(1377년)이든, 혹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본(보물 758-2호·1239년 무렵)이든 43~181년이나 흘렀던 때입니다.
바로 그럴 때 조선의 태종과 세종은 양질의 금속활자를 개발해서 책을 대량인쇄하는 것을 국책사업으로 여기고 분투하고 있었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태종(재위 1400~1418)은 1403년(태종 3년) 주자소를 만들면서 “국내에 책이 너무 적어서 유생(儒生)들이 공부할 수 없다”(2월13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태종이 주자소를 만들려 했을 때 신료들은 “소용없는 일”이라면서 한결같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답니다. 그러나 실록에 따르면 태종은 ‘억지로 우겨서’ 주자소를 만들었습니다(<세종실록> 1434년 7월2일).
왜 신료들이 입을 모아 반대했을까요. 고려·조선시대 금속활자의 주조 및 인쇄술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죠. 왜냐. 이때의 금속활자는 모래주형(주물사)에 따라 주조했습니다.
“부드러운 갯벌을 평평하게 편 인판(印板)에 나무에 새긴 활자를 찍으면 글자가 새겨진다. 인판이 말라 굳어지면 쇳물이 통할 구멍과 길을 만들어놓고 다른 판을 겹친 뒤 구리액을 구멍으로 쏟아붓는다. 그러면 구리액이 패인 곳에 들어가 하나하나 글자가 된다.”(성현의 <용재총화>)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주조기술이 부족했습니다. 초기의 금속활자를 보면 주조 때 생긴 쇳물찌꺼기와 같은 흠결이 보입니다. 인쇄할 때도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조한 활자들을 조판틀에 움직이지 않게 배열하고 먹을 묻힌 뒤 종이를 덮고 골고루 문질러야 인쇄가 되겠죠. 하지만 한 자 한 자 조판된 활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세종실록>(1434년 7월2일)을 보면 인쇄 때의 괴로움이 절절이 배어나옵니다.
“인쇄할 때 먼저 밀랍(蜜蠟·꿀 찌꺼기를 끓여서 짜낸 기름)을 조판틀 밑에 펴고 그 위에 글자를 차례로 맞추어 꽂는다. 그러나 아무리 말려도 밀랍의 성질이 원래 부드러우니 조판활자가 굳지 못했다. 겨우 두어 장만 인쇄하면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져서 인쇄하는 자가 괴롭게 여겼다.”
이런 지경이었으니 태종이 주자소를 만든다고 할 때 대소신료들이 “절대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반대한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죠. 태종이 온갖 어려움 끝에 계미자(1403년)를 보완한 ‘정해자’를 만들고(1407년) 그 뒤에도 3년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인 1410년(태종 10년) 인쇄본을 찍어냈지만 만족할 수 없었답니다.
■가장 아름다운 활자 발명
1418년 세종(재위 1418~1450)이 아버지(태종)가 이루지못한 과업의 바통을 이어받습니다. 1420년(세종 2년) 세종은 우선 당대의 과학자이자 공조참판인 이천(1376~1451)에게 “아무래도 (‘정해자’ 등 기존의) 글자 모양이 고르지 않으니 당신이 한번 새롭게 만들어보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이천은 온갖 방법을 짜내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니 ‘경자자’입니다. 경자년(1420년)에 개발했다 해서 ‘경자자’가 된거죠. 이번에 와세대대 도서관에서 찾아낸 <이남지남>이 바로 이 경자자로 찍었다는 거죠.
어쨌든 <세종실록>은 “나름 정교하고 치밀했다는 ‘경자자’ 개발로 하루에 20여장 인쇄할 수 있었다”(1422년 10월29일)고 했습니다. 세종은 경자자를 개발한 주자소 관리들에게 “수고했다”면서 술 120병과 고기를 하사했습니다. 주자소에서는 1420년부터 2년간 <자치통감강목>을 찍어냈습니다.
그래도 뭔가 부족했습니다. 여전히 ‘인쇄 때 글자가 이리저리 쏠리고 비뚤어지는 폐단’이 있었기 때문이죠. 다시 14년이 흐른 1434년(세종 16년), 세종은 다시 이천을 호출합니다. 당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59세)였던 이천은 “할 수 없다”고 완곡히 사양했는데요. 세종이 누굽니까. “당신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세종 본인의 표현대로 ‘강요’했습니다. 세종의 특명을 받은 이천은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경자자’의 단점을 상당부분 보완합니다. <세종실록> 1434년 7월2일자를 볼까요.
“내(세종)가 ‘강요하자’ 경(이천)의 지혜로 밀랍을 쓰지 않고도 조판한 글자들이 흔들리지 않으니….”
신기하죠. 이천은 어떻게 밀랍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조판한 글자를 흔들리지 않게 만들었을까요.
“처음에는 글자를 조판하는 법을 몰라서 밀랍을 녹여서 글자와 글자 사이를 붙였다. 그러나 단단하게 굳지 않았다. 그 뒤에 대나무로 빈 곳를 메우는 재주를 써서 밀납을 녹이는 비용을 없앴다.”(<용재총화>)
즉 활자와 활자 사이의 빈곳에 대나무를 메워서 조판한 활자들을 고정시킨 겁니다.
이때, 즉 갑인년인 1434년(세종 16년) 개발한 이 활자에는 ‘갑인자’라는 이름이 붙었답니다. ‘갑인자’는 14년전에 개발한 ‘경자자’에 비하여 조금 크고 글자의 체가 매우 좋았습니다. ‘경자자’의 자체가 가늘고 빽빽해서 보기 어렵다는 여론이 있었기 때문에 개선한 거죠. 이 ‘갑인자’로 하루에 40여 장 인쇄하는데 성공할만큼 조판틀(활판)을 고정시키는 기술도 발전했습니다.
‘갑인자’로 찍어낸 책은 글자획에 필력(筆力)의 약동이 잘 나타나고 글자 사이가 여유있게 떨어져 있으며, 판면이 커서 늠름합니다. 또 먹물이 시커멓고 윤이 나서 한결 선명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이 ‘갑인자’는 활자본의 백미로 일컬어집니다. 이로써 활자는 정해자(1407년)→경자자(1420년)→갑인자(1434년)로, 인쇄는 두어장(태종 때)→20여장(1420년)→40여장(1434년)으로 진보했답니다.
■손수 한글로 지은 월인천강지곡
모처럼 만족할만한 활자(갑인자)를 20여 만 자를 주조했습니다. 그 활자로 평소 찍고 싶었던 책을 발행 보급합니다. 조선과 중국의 효자·충신·열녀 각 110명을 선정해서 삽화(그림)를 그리고, 그림 설명과 시(詩)까지 붙인 <삼강행실도>를 제작·배포합니다(1434년). 무지몽매 때문에 삼강오륜을 저버리는 범죄는 없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또 아동들을 가르치기 위한 유학 수신서인 <소학>도 찍었고, 역사서인 <자치통감>까지 간행합니다. <세종실록>은 “이제 큰 활자(갑인자)를 주조했으니…<자치통감>을 인쇄하고 전국에 반포해서 노인들이 보기 쉽도록 하고자 한다. 종이 30만권만 준비하면 500~600질을 인쇄할 수 있다”고 뿌듯해 했답니다. 눈이 침침한 노인들도 책을 보게 하려고 활자가 큰 갑인자를 개발했다는 얘기잖습니까.
금속활자를 그토록 개발하려 했던 세종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씨’가 구구절절 배어나옵니다.
세종은 “‘갑인자’ 개발로 서적이 널리 인쇄되어 배우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문화와 교육이 번성하고 세상의 도리가 높아질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1434년(세종 16년) 한자 금속활자의 백미라는 ‘갑인자’를 제작한 세종은 9년 뒤(1443년) ‘훈민정음 창제’라는 불세출의 과업을 완수하죠. 그런 뒤에는 또하나의 과업을 시도합니다.
막 창제(1443년), 반포(1446년)한 한글의 금속활자를 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종은 둘째아들인 수양대군(훗날 세조·재위 1455~1468)에게 특명을 내리는데요.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편찬해서 훈민정음 반포 7개월전 죽은 부인(소헌왕후·1395~1446)의 명복을 빈다는 것이었습니다. 소헌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거든요.
이 명에 따라 수양대군은 <석보상절>을 편찬한 뒤 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했는데요(1447년). 세종은 이 <석보상절>을 꼼꼼이 읽고 각 2구절에 따라 막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한 찬불가 583곡을 손수 지었는데요. 그것이 <월인천강지곡>이죠.
■최초의 한글활자는?
중요한 것은 이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등 두 책은 1434년 개발한 갑인자(한자 활자)와 함께 특별히 주조한 한글 금속활자를 조판해서 간행했다는 거죠. <석보상절>의 편찬이 1447년 9월에 완료·간행되었으니 한글활자도 이 무렵에 주조된 것으로 보이죠.
그러니까 두 책은 훈민정음 창제 후 1년 남짓 지났을 때 주조된,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최초의 한글금속활자로 간행된 겁니다. 그러나 이때 주조한 한글활자는 전해지는 것이 없는데요.
지난해(2020년) 10월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후 주조한 최초의 한글금속활자를 최첨단 기술인 인공지능(AI)을 활용하여 분석·복원하는 기법이 처음으로 시도되었는데요. 정재영·최강선 한국기술교육대 연구팀이 4개월동안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서 현존하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의 활자본을 분석한 뒤 세종대왕 당시의 한글금속활자를 복원하는 과정을 개발한 건데요.
■천지인으로 만들었는데 어찌 삐침을?
그렇게 3D 기술로 복원한 한글금속활자는 일단 ‘월’, ‘인’, ‘천’, ‘강’, ‘지’, ‘곡’과 ‘니’, ‘텬’ 등 8자였는데요. 연구를 주도한 정재영 교수의 촌평이 인상깊더군요. 세종이 붓글씨만이 존재했던 당대에 ‘돋움체(고딕체)’의 한글을 창제한 것에 새삼 감탄했다는 거예요. ‘돋움체’는 서양에서 ‘획의 삐침이 없는 글씨체’를 뜻하는데요. 산세리프, 혹은 고딕체로도 하는데요. 이 글씨체는 18~19세기 사이에 유행한 글꼴인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그러나 그보다 300~400년 전 조선의 세종이 다양한 획과 굵기로 쓰는 한자 붓글씨 사회에서 점과 선 만을 이용한 ‘돋움체’의 글자, 즉 한글을 창제할 생각을 한 거죠.
정재영 교수는 그것을 훈민정음 창제 원리와 연결짓는데요. 즉 세종은 한글의 첫음(자음)은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떴고, 가운데 소리(모음)는 하늘(·)과 땅(ㅡ), 사람(ㅣ)을 뜻하는 천지인을 바탕으로 만들었는데요. 사람의 발성기관을 본떴고, 자연 및 인간의 섭리를 담은 천지인을 떠올려 가장 간단한 점(·)과 선(ㅡㅣ)만으로 표현했는데 어떻게 흘림체나 삐침을 허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지극히 간단하지만 심오한 뜻을 품고 있는 ‘돋움체’로 표현했다는 거죠.
흥미로운 것은 세종이 서양에서 금속활자를 발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와 동년배라는 겁니다. 세종이 1397년생이고, 구텐베르크 역시 1397년에서 1400년 사이 태어났다고 하거든요.
세종이 가장 아름다운 금속활자라는 ‘갑인자’를 개발한 1434년이면 어떨까요. 구텐베르크는 인쇄술의 걸음마도 떼지 못했거나 막 내딛었던 때였답니다. 또 1447~48년 무렵이라면 어떨까요. 구텐베르크는 이제야 금속활자술을 터득하고 고향인 마인츠로 돌아오던 때였습니다. 이 무렵 세종은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 나절이 되기 전에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쉬운 글자를 창제하고 이를 곧바로 금속활자로 찍어내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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