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월요묵상] 본심을 되찾는 수련을 하십니까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입력 2021. 4. 12. 05:31 수정 2021. 6. 8.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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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고전문헌학자© 뉴스1

(서울=뉴스1)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 인생은 본래 자신의 모습을 찾아오는 긴 여정이다. 그런 시도를 '정신을 차렸다' 혹은 '제정신이다'라고 부른다. '제정신'은 순수 한국어 '저의'의 준말 '제'와 '정신'의 합성어다. 우리가 자신의 정신으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기하고는 상관이 없는, 혹은 자신하고 연관된 타인들이 좋다고 제시한 세계관, 종교관, 삶의 철학을 수용하여 자기 삶의 문법을 구축하려 한다. 타인의 이념, 철학, 교리, 가르침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모래 위에서 세운 집이다.

인간의 마음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런 외부의 유혹에 경도된 '욕심'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되어야 하고 자신이 될 수 있는 그 마음인 '본심'이다. 본심은 성배와 같아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그 존재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지 가만히 추적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매일 매일 수련할 때, 슬그머니 등장하는 밤하늘의 작은 별이다. '욕심'은 '과유불급'이라는 진리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의 처사다. 그것은 배가 부르면서도 자신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게걸스럽게 먹으려는 식탐과 같다. 인간은 동물 중에서 자신이 배부른지 알면서도 과도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유일한 동물이다.

욕심(慾)이란 한자가 그렇다. 깊은 골짜기(谷)에서 끝없이 흘러내려 오는 물을 자신의 작은 입을 벌려(欠)다 마셔보겠다는 마음(心)이다. 욕망이란 단어가 근사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을 매일 값싸게 만드는 마음의 마약이다. 이 욕심에서 벗어나 자신으로 돌아와야 자신에게 온전하고 타인에게 친절한 사람이 된다. 인간은 모두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다. 바로 '본심'이다.

본심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웅장한 나무의 뿌리와 같다. 저 큰 나무가 언제나 중력을 거슬러 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를 수 있는 이유는, 그 높이와 너비에 어울리는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본심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원래의 마음, 참마음이다. 인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의 발굴과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 교육은 이 본심을 정성스럽게 발굴하는 체계다. 이 본심은 이웃과 심지어는 원수와도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통하기 때문에 인류, 자연, 그리고 우주 보편적이다. 이 보편적인 마음을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는 '아함 브라흐마스미', 즉 '나는 우주다'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동물로 태어난다. 태어나서 하는 일이란, 배가 부르고 편하면 웃거나 자고 혹은 불편하거나 배고프면 우는 것이다. 동물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거나 자신의 유전자 속에 장착된, 조상에게 물려받는 이기적인 유전자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뿐이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싸우는 세상은 지옥이다. 그리스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는 비극 '필록텍테스'에서 인간의 본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여, 인간은 끊임없는 슬픔과 형용할 수 없는 고뇌의 운명을 타고났다!"

여기 역경과 고통을 통해 자신으로 돌아온, 자신의 본심을 발견한 이야기가 있다. 신약성서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소위 '탕자의 비유'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은 욕심에 사로잡혀 있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유산을 미리 요구하여, '먼 지방'에서 쾌락을 위해 산다. '먼 지방'은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하는 '본향'과는 달리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을 통해 살아남는 장소다. 그곳은 또한 권력과 돈,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약육강식의 치열한 싸움터다. 영적으로 고갈되어 있는 이곳에선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순간의 쾌락을 위한 유혹이 난무한다. 쾌락은 이곳에 존재하는 무시무시한 경쟁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약이다. 성서는 작은아들이 "거기에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라고 기록한다.

여기서 '재산'이란 원래 자신의 모습이며 존재다. 인간은 언젠가 이와 유사한 과정을 밟는다. 가정이라는 위대한 공동체를 통해 사랑과 헌신이 가장 소중한 가치라는 것을 배웠지만, 학교에서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첨예하게 연마한다. 우리는 그 욕망의 소용돌이 안에서 영적으로 빈사 상태가 되고 끝없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경쟁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긴다. '방탕하게 살았다'라는 표현은 육체적인 타락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본심의 고사 상태이기도 하다. 본심에서 흘러나오는 '사랑과 용서'라는 가치가 고갈되었다.

<누가복음>은 먼 곳에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가 그것을 다 탕진했을 때에,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지방에 사는 어떤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주는 사람이 없었다." 작은아들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공동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고통은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는 나침반을 선물한다. 그 나침반은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침묵'이다. 침묵은 자신이 돌아가야 할 장소를 정확하게 알려준다. 정적은 인간이 정신을 다시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다. 인류의 불행은 가만있지 못하는 안달에서 온다. 영국 시인 T.S. 엘리엇은 장시 '네 개의 사중주'(Four Quartets)에서 조용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또 다른 강렬함으로. 그것은 원대한 합일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심오한 교섭을 위한 것입니다. 어둡고 차갑고 공허한 쓸쓸함을 통해 삶의 강렬함을 경험할 것입니다."(We must be still and still moving Into another intensity For a further union, a deeper communion Through the dark cold and the empty desolation.)

엘리엇이 말한 '이 강렬한 순간'을 <누가복음> 15.17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가 그 자기-자신으로 돌아왔다." 탕자가 고통을 통해 그 자신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본심이다. 그 본심은 자기-자신이다. 인류는 자신의 본향을 떠나 눈으로 볼 수 없는 바이러스의 포로가 되어 유배 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은 내가 욕심으로 살아왔는지 가만히 지켜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나는 욕심의 꼭두각시로 살 것인가? 아니면 본심을 발굴하여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타인에게 아름다운 삶을 추구할 것인가?

덴마크 화가 라우릿스 안데르센 링 (1854–1933)의 유화 '창밖을 보는 아들 올레', 덴마크 란더스미술관.© 뉴스1

yeh25@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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