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어느 '세월' 꼭 꿈으로라도 다녀가렴

2021. 4. 12.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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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땅] <15> 제주 '4·16 세월호 기억관'
7년 전 4월 그날 이후 많은 사람들은 그때의 아픔과 서러움을 문학으로, 공연으로, 음악으로 기억하려고 했다. 아이들이 가고자 했던 그 제주에 들어선 ‘세월호 제주 기억관’에선 사람과 안전을 떠올리며 각자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추모한다.

‘너는 돌 때 실을 잡았는데/ 명주실을 새로 사서 놓을 것을 쓰던 걸 놓아서 이리 되었을까// 엄마가 다 늙어 낳아서 오래 품지도 못하고 빨리 낳았어/ 한 달이라도 더 품었으면 사주가 바뀌어 살았을까// 엄마는 모든 걸 잘못한 죄인이다./ 몇 푼 벌어 보겠다고 일하느라 마지막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 엄마가 부자가 아니라서 미안해 없는 집에 너같이 예쁜 애를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엄마가 지옥 갈게 딸은 천국에 가.’(안산 합동분향소에 있던 단원고 학생 어머니의 편지 중에서)

유가족들은 트라우마를 치료하려 진행했던 목공이나 수공예를 확장시켜 희망을 이야기하는 4·16목공소를 만들었다.

공교롭게도 아이의 백일 상에 올려 두었던 용품들과 명주실 타래를 책상 서랍에 넣어 둔 날이었다. 차일피일 정리를 미루다 결국 아이가 200일 가까이 되고 나서야 계획했던 예쁜 상자에 넣는 일은커녕 그것들을 그저 안 보이는 데로 치우기만 한 거였다. 하필 그 저녁에 저 편지를 읽고야 말았다. 처음 대하는 것이 아닌데도 마음 한쪽의 실밥이 툭 터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사월이다. 당연히 돌아가는 시계이고, 돌아오는 계절인데도 그 후로 4월이면 이상하게 몸과 마음이 눅진하다. 아기를 낳고 나니 뼈 안쪽이 더 지긋해지는 것 같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나도 이럴진대 그 아이들의 엄마 아빠는 어떨까 하며 제주 쪽을, 합동분향소와 학교가 있던 안산 쪽을 굽어본다.

2014년 4월 16일. 소설 마감과 학교 수업 준비에 밤을 새우고 정신없이 등교했다. 교실에 들어섰는데 아이들의 행동이, 교실의 공기가 여느 날과 사뭇 달랐다. 마주 앉아 있는 학생 몇몇은 울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대답 대신 우는소리만 돌아왔다. 학교는 단원고와는 십여㎞쯤 떨어진 곳이었다.

초조하게 뉴스를 보던 아이들과 ‘전원구조’라는 자막이 올라왔을 땐 안도했지만, 수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원이 구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퍼졌다. 학생들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 후의 일들은 파편으로만 남아 있다. 추모를 위한 모임이나 분향소에 가지 말 것, 상복으로 느껴질 만한 색의 정장을 입고 등교하지 말 것 등의 ‘이상한’ 공문이 내려왔고 그것이 하달될 때마다 나를 비롯한 여러 선생님은 탄식과 저항의 말들을 쏟아냈다.

공방에서 태어난 다양한 작품들.

노란 리본을 달고 등교하는 것도 금지였다. 나는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리본 스티커를 구해서 차에 붙였다. 꿋꿋하게 검은 옷을 입고 갔고, 방과 후 수업을 빠지고 장례식장에 다녀오겠다는 아이들을 말리지 않았다. 1주기에는 서울 광화문광장으로 갔다.

광장을 빙 둘러쌌던 그날의 차벽들과 저항하던 사람들, 그리고 경복궁 앞에 웅크리고 있던 삭발한 유가족들. 곳곳에서 터지던 비명과 고함, 그리고 차벽을 넘어갔다가 아예 차체를 쓰러뜨리던 사람들 곁에 나는 그저 서 있었다. 이리저리 사람들이 몰려다니던 한복판에 그저 서 있었다. 단지 그 한가운데 자식을 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머리를 깎고, 밥을 굶고 앉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것밖에, 그렇게밖에 할 수 없던 날이었다.

공방에서 태어난 다양한 작품들.

세월호에 관련된 문학 작품들을 읽고 있던 대학의 강의실에서 누군가 크게 울어 이유를 물어보니 그 전날 수학여행을 마치고 자신들이 타고 왔던 배가 세월호여서 어쩌면 ‘우리의 일’이 될 수도 있었다는 학생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의 아연함이라니. 그리고 그것을 듣는, 희생자의 친구 얼굴은 또 얼마나 어두웠던가.

7년이 지났다. 그로부터 세상은 얼마나 많은 것이 변했나. 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과 정책의 결정자들은 얼마나 달라졌나. 7년이라는 세월을 대충 가늠하기도 전에 여전히 광장에, 청와대 앞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속해서 삭발하고 끼니를 거르며 서 있다. 어째서 저들이 여전히 저 자리에 서 있는가.

공방에서 태어난 다양한 작품들.

정권이 바뀌고 사람들이 세월호를 잊어가는 동안에도 유가족들을 비롯해 생존자들은 많은 것들을 ‘스스로’ 해 나갔다. 단원고에 4·16 기억교실을 세워 기록물 보존과 유품, 유류품들을 보존 관리하기 시작했고, 기록 유형에 상관없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모든 기록물을 수집하고 등록하며 정리했다. 마을 공동체 등과 협업해 마을 아카이빙 양성교육, 미래세대 청소년 기록단 양성교육과 단원고 4·16 기억교실에서의 민주 시민 교육 등을 활성화했으며 4·16 기억 전시관의 문을 열었다.

총 100권으로 쓰인 구술 증언록 ‘그날을 말하다’를 출간했고, 팽목항에 ‘팽목 기억관’을 세우고 지켰다. 엄마들이 모여 뜨개질을 했고, 아빠들은 목공예 작업을 시작했다. 합창단과 연극팀을 꾸려 전국 곳곳을 다니며 공연도 했다. 명예졸업식을 치르고, 해마다 기일이 되면 각자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추모하러 다닌다. 희생자 학생들 외에 일반인 유가족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다 잊지 않기 위해, 참척의 아픔을 삭이려 다니던 길 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쌓은 발자취들이었다. 또 유가족들은 5·18과 선감학원, 남영호 등의 피해자들을 만나는 일도 병행했다. 상처와 상처들이 만나 참사와 안전 그리고 연대라는 말들과 함께 새로이 어깨를 견주었다.

제주에 기억 공간을 만든 것도 역시 유가족들이었다. ‘세월호 제주 기억관’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우리 아이들이 그토록 오고 싶어 했지만 끝내 닿지 못했던 곳, 제주에 아이들을 위한 기억 공간을 만들자”는 생존학생 장애진 아빠 장동원씨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4·16 가족협의회와 평화쉼터 신동훈 대표가 협약서를 체결하고 6개월 준비 기간을 거쳐 신동욱 작가가 완성한 현판 글씨체를 강정마을을 지키던 문정현 신부께서 조각해 주셨다. 이 소식을 듣고 제주로 속속들이 도착하는 도서, 조각품, 나눔 물건 등을 전시하면서 2019년 11월 6일 제주 4·3 평화공원 아래에 ‘세월호 제주 기억관’이 탄생했다.

4·16의 숙명처럼 깃든 노란 리본 조형물 옆에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가 남겨져 있다.

누구나 편안하게 찾아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기억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하는 공간’을 목표로 한다. 기억관 내의 세월호 리본 옆에 그달에 생일을 맞은 아이들을 기리는 일도 하고 있다. 2015년에 택시기사 임영호씨의 도움으로 ‘한별이’에게 생일 케이크와 꽃 화분을 전달했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그 생일 기억 공간이 무척 특별하게 보였다. 기일이나 추모 대신 생일을 기억해 주는 일이라니!

제주 기억관에서는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뿐만 아니라 4·3의 아픈 기억을 새긴 동백 배지도 함께 전시하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리본과 배지를 함께 나눠 주는 일을 진행 중이다. 단장이 끊어지는 듯한 아픔 속에서도 유가족들은 먼저 간 아이와의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해,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 이 많은 일들을 ‘스스로’ 해 나갔고, 아직 아무런 답이 없는 정부에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정치인들의 약속은 허공에 떠 있고, 노란 리본은 나날이 빛을 잃어가는 동안에도 ‘엄마’이자 ‘아빠’인 가족들은 힘을 내었다. 7년이 지나는 동안 서서히 사람들의 뇌리에서도 잊혀져 가던 아이들의 흔적을 혼신을 다해 기록해 두었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 그들에게는 노란빛의 숙명처럼 다가든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안전법들은, 연대의 방식들은 유가족들이 해 낸 것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엄마 아빠들이 직접 만든 목공예품들은 현란한 꾸밈이나 노련한 솜씨들은 아니지만 사포질 하나에도 아이의 모습을 담아 매만졌을 거라 생각하면 세상에서 가장 애잔한 조형물들처럼 느껴진다. 그 옆에는 304개 리본 트리와 기억조형물들이 놓여 제주 기억관을 꽉 채운다. 관람객들은 물론이거니와 생존자들도 간혹 다녀가는데, 희생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생존자들 역시도 나름의 방식으로 이 시간을 견디고 또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들의 앞길이 모쪼록 편안하기를.

소설가 이은선

금요일에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수요일에 떠났던 수학여행은 여전히 진도 해상 어디쯤에서 멈춰 있다. 그들 대신 세월호 기억관이 제주에 왔다. 못다 한 수학여행을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마무리하길, 매년 다가오는 봄의 어느 금요일에는 꼭 꿈으로라도, 바람이나 이슬, 햇살로라도 다가오길. 후생에는 꼭 다시 태어나 무병장수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수학여행 길에 동참했다.

‘어디까지 와시니?/ 용머리해안까지 와수다/ 어디까지 와시니?/ 마라도 와수다 어디까지 와시니?/ 약천사 와수다/ 어디까지 와시니?/ 외돌개 와수다/(중략)/ 어디까지 와시니?/ 미천굴까지 와수다/ 어디까지 와시니?/ 성산일출봉 와수다/ …이젠 어디로 갈 거고/ …엄마…/ …집에는 언제 와시니?/ …아빠…/ 아가, 어디까지 와시니?/ …못 찾겠다 꾀꼬리!/ …할아버지…// (중략) 내 소리 들어점시냐/ 이 하르방 보염시냐/ 설운 애기 어디까정 와시니/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중략) 찾았다!/ 안녕…할아버지!

(소설 ‘귤목’(橘木) 중에서)

소설가 이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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