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광주여, 코로나 앓는 인류여, 울지 말고 함께 꽃길을 걷자
의사들이 계엄군 막아서던 곳
옛 국군병원에 광주 작가들 모여
1980년 당시 기억 섬세히 가공
새로운 연대의 미학을 작품으로
지금 광주의 미술은 마침내 1980년 5월을 넘어 진화를 시작했다.
작가들은 5·18 민주화운동의 상처를 더는 아프다고 울부짖지 않고 잠잠한 눈길로 광주의 현재와 미래를 응시했다. 비극의 기억과 해원, 그리고 연대의 이미지들로 채운 그림과 설치작품들로 당시의 공간을 수놓았다. 지난 1일 개막해 5월9일까지 열리는 국내 최대 규모의 국제미술잔치인 제13회 광주비엔날레는 비로소 비엔날레의 주역으로 광주 미술이 우뚝 섰다는 낭보를 전했다. 코로나19 사태로 해를 넘겨가며 두차례나 연기되는 곡절을 겪었지만, 역대 처음 광주 작가들과 광주 미술 콘텐츠가 비엔날레의 중심으로 부각되는 성과를 이뤘다.
김선정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의 총괄 아래 터키의 데프네 아야스, 인도의 나타샤 진발라 두 30~40대 여성 예술감독이 기획한 이번 행사는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Minds Rising, Spirits Tuning)을 주제로 공표했다.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진정한 지성의 원천이었던 샤머니즘과 무속 심령세계를 조명해온 40여개국 작가 69명의 작품을 크게 네 영역의 전시 형태로 내놓았다. 지난해 국제미술제 행사들이 사실상 대부분 중단된 상황이었던 터라 마음을 소재로 치유와 연대를 표방한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개막은 세계 미술계의 눈길을 모으는 이벤트로 떠올랐다. 그런데 뜻밖에도 비엔날레 주인공으로 지목된 건 본전시가 아닌 곁가지 전시에 출품한 광주의 작가들이었다.
“지구의 생명체계와 공동체 생존 방식을 활성화한다”는 두 감독의 발언 아래 ‘떠오르는 마음’이란 전시 주제를 샤머니즘의 전당 식으로 구현한 본전시관은 선전했지만, 이전처럼 집중적인 눈길을 받지 못했다. 행사가 개막되자 언론을 비롯한 관객 대부분의 관심은 옛 국군병원에서 열린 중견 소장 광주 작가들이 기억과 공감을 통해 이뤄낸 특별전 ‘메이투데이’에 단연 쏠렸다. 광주 작가들은 1980년 학살과 항쟁의 상처를 넘어 당시의 기억을 섬세하게 가다듬고 가공해 새로운 연대의 미학을 만들었다. 사상 최초로 비엔날레 작가들과 박물관의 남도 토기와 인골 유물 컬렉션이 만난 국립광주박물관의 전시는 또 다른 맥락의 광주 미학을 실험하는 자리가 됐다.
■ 데이지꽃길과 채혈줄 다발로 떠올린 광주
광주 화정동 옛 국군병원 공간에 광주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차린 프로젝트 전시 ‘메이투데이’는 유례없이 광주비엔날레 전시의 핵심이 됐다. 이 병원은 민주화운동 당시 부상자를 치료하고 사망자를 안치했던 곳이며, 계엄군이 부상한 시민들을 끌어가지 못하도록 의사들이 환자들을 결사적으로 지켰던 곳이다. 2007년 전남 함평으로 병원이 이전한 뒤 내년 국립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 건립을 앞두고 여전히 폐허 상태인 과거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오히려 작가들의 상상력을 북돋웠다. 올해 광주비엔날레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문선희 작가의 데이지꽃밭 설치작품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는 병원의 이런 소슬한 분위기에 딱 맞는 작품이다. 병원 중환자실로 가는 계단 공간에 작가는 아리따운 데이지꽃밭을 펼쳐놓고 관객들이 이를 지나가게 했다. 관객은 예쁜 꽃들로 마음을 정화하고 치유의 내음을 맡게 된다.
한 병실에 선보인 김설아 작가의 설치조형물 <불면의 읊조림 비명의 기억>은 피를 뽑는 채혈줄 다발로 이뤄진 작품이다. 작가는 당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와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이들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 채혈줄 설치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작가 강운씨의 추상 유화 <마음산책―망자를 위한 진혼시>는 마치 병원 내 체육실 창가에 선 채로 말을 중얼거리는 듯한 큰 그림의 유령 같은 이미지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광주의 비극을 노래한 김준태 시인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적은 글씨를 수없이 지우고 물감으로 덧칠한 흔적을 단색조의 화면에 표현했다.
■ 새모양 토기와 인골에 깃든 고대 남도인의 삶과 죽음
올해 비엔날레는 역대 최초로 박물관 유물들과 현대미술가의 협업을 성사시켰다. 그 무대는 본전시와 별개로 국립광주박물관 로비와 1층 기획전시실에 차려진 또다른 맥락의 주제전이다. 두 전시감독이 2년전 취임 초창기부터 고고학적 탐구를 통해 아득한 과거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인류의 ‘마음 찾기’를 강조하면서 기획된 자리다.
국립광주박물관 주제전은 들머리에 자리잡은 그리스 작가 크리산네 스타타코스의 <세개의 다키니 거울>로 시작된다. 티베트 비구니 승려와의 교류로 알게 된 만다라 도상에 그리스 신화의 삼발이 그릇과 꽃잎들을 뿌린 작품은 시간 변화에 따라 꽃잎이 시들고 작품의 변화가 감지되는 틀거지를 지닌다.
남도 특유의 1700여년 전 원삼국시대 새모양 토기는 인도 자이나교의 우주론을 그림으로 풀어낸 삽화, 인간의 윤회를 다루는 불교신 야마의 그림과 함께 어우러진다. 새는 지상계와 천상계, 이승과 저승을 잇는 매개체다. 브이(V) 자 날개 모양의 강렬한 토기의 조형적 이미지가 새의 샤머니즘적 속성을 한껏 강조해 보여준다. 유성 잉크를 종이 위에 떨어뜨려 카오스적인 마블링 이미지를 만드는 미국 작가 갈라 포라스 킴의 추상 그림은 광주 신창리 저습지에서 나온 원삼국시대 인골 앞에 놓여, 종잡을 수 없는 우리의 인생과 죽음에 대한 사유를 부추긴다. 인골은 정연하게 가로놓인 형태가 아니라 수장고에 들어가기 위해 솜과 중성지에 쌓인 수납 상태의 낯선 모습으로 나타나 관객에게 깊은 성찰을 일깨운다. 충청도 보석사에 망자들을 위안하기 위해 내걸렸던 대형 감로도와 감로도의 초본은 명부시왕을 그린 십대왕 그림, 바리공주 그림과 나란히 놓여 죽은 자들에 대한 심판과 삶과 죽음의 경계를 조용히 이야기한다. 전시장 안쪽에선 점치는 그림인 당사주와 각종 무속신상이 새겨진 설위설경의 모습이 눈앞에 다가오고, 그 위 천장에는 꼭두 상여 장식의 봉황새 두마리가 매달려 있다.
■ 거대한 굿판? 샤머니즘으로 뒤덮인 본전시관
광주 용봉동 비엔날레 본전시관과 국립광주박물관 등의 주제전에는 한국과 인도를 비롯한 제3세계의 무속화, 민화, 민간신앙 등을 소재로 한 현대미술 작품이 대거 등장해 팬데믹 시대의 정신적 치유 등에 초점을 맞춘 구도를 보여준다.
전시 동선에서도 대부분의 전시장에서 가벽을 트고, 3전시실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는 휘장을 치면서 시원하고 과감한 관람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샤머니즘 중심의 전시 명제나 작품 배치는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대두 이래 여러 비엔날레나 국제미술전에서 시도했던 것들이어서 참신하지는 않았고 작품들의 배열도 산만한 느낌을 줬다. 기존 비엔날레 틀거지를 벗어나지 못한 전시틀 자체보다는 참여한 국내 작가들의 농익은 노작들에 더욱 눈길이 갔다. 한반도의 근현대사와 광주의 공간사를 중심으로 치밀하게 삭히고 발효시킨, 차원이 다른 수작이 상당수 등장했다.
본전시관의 결정판은 2~5전시실의 내용을 압축한 1전시실이다. 한국인 특유의 신명과 한의 정서를 유명한 사진 연작 <충돌과 반동>으로 포착한 이갑철 작가의 ‘지랄 맞은’ 한국인들의 굿 사진으로 시작하는 이 전시에서 문경원 작가의 설치작품 <프로미스 파크, 광주>를 단연 주목할 만하다. 1950~60년대 옛 방적기술로 짠 카펫 위에 세월에 따른 광주 도시 풍경의 변화 양상을 추상적 문양으로 표현해 일종의 시간공원을 펼쳐놓았다. 이 작품은 국내 작가들의 광주 탐구가 이제 오랜 시간 사회학·인문학적 탐구를 통한 숙성과 숙고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유럽 사미족 출신 작가 오우티 피에스키의 설치작품 <함께 떠오르기>는 사미족 전통옷을 수놓은 술 모양의 천조각을 숱하게 엮어 종족의 정체성과 연대감을 드러냈다. 아일랜드 출신 작가 존 제라드가 아일랜드 전통 밀짚옷을 두른 소년들의 퍼포먼스를 담은 <옥수수 작업>도 색다른 구성과 작품 배경이 주목된다. 무속작업으로는 1전시실에 내걸린 1950년대 추정 국내 무속도(가회민화박물관 소장)가 단연 압권이었다. 예수·석가·공자가 함께 어울려 3대 무속신으로 등장하는 독특한 설정이 흥미롭다. 김상돈 작가의 움직이는 설치작품 <카트>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린 샤머니즘 무속신앙과 현대의 과잉소비 문화 등을 카트 위에 올린 전통 상여와 꼭두 장식물 등을 통해 드러냈다.
2~5전시실에서는 반바지를 입힌 마네킹 엉덩이들을 탑처럼 쌓아 자본 탐욕에 찌든 현대인의 권태감을 표상한 파트리시아 도밍게스의 설치물, 제주 해녀가 떠오를 때 내는 숨비소리를 후두를 본뜬 조형물의 음통으로 들려준 네덜란드 작가 펨커 헤레흐라번의 신작 등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3전시실 들머리에 내걸린 이상호 작가의 집단초상화 <일제를 빛낸 사람들>도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은 신작이었다. 방응모, 김성수, 박정희 등 일제강점기 친일파 행적으로 오점을 찍은 인사 92명이 수갑을 찬 채 도열한 모습을 그린 대작으로 기발한 구도와 호소력이 돋보였다. 작가는 80년대 날선 반미투쟁도를 그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전력이 있는 현장 미술운동가 출신이다. <일제를 빛낸과 더불어 전통 불화 등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그의 90년대 구작 <권력해부도> <통일해원도> 등이 칠레 출신 여성작가 세실리아 비쿠냐의 사회 비판적 그림들과 나란히 마주보는 구도로 배치된 점이 흥미롭다. 해골과 동물, 전사와 정부군이 뒤얽힌 풍자적 그림으로 독재 정권을 꼬집은 비쿠냐의 출품작들은 이땅 전통회화의 전통에서 영감을 길어온 이상호 작가의 리얼리즘 작품과 독특한 조응을 보여줬다.
전반적으로 전체 전시 기획은 훨씬 진일보했다. 난삽하고 무거운 현대미술 작품들을 끌어들여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급조하면서 무리한 진행으로 혹평을 받은 지난 비엔날레의 문제점을 인식한 기획진은 행사 연기에 따른 시간 여유까지 누리며 전시 구성과 기획에서 짜임새 있고 분명한 주제의식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구호와 정치적 메시지를 외치는 차원을 넘어 1980년을 체험하지 않은 후대 세대와 세계인들이 함께 마음으로 나누고 연대할 수 있는 광주 문화 정신의 미래상을 제시했다. 황석권 <월간미술> 편집장은 “이제 비로소 광주의 작가들이 미술이란 화두로 비엔날레를 주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 보여줬다”고 짚었다.
■ 시내 곳곳에 갈라지고 흩어진 전시장들
이번 비엔날레는 크게 네 개의 전시 영역으로 나뉘어지며, 관련 전시장들이 광주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주제 전만 해도 광주 용봉동 본전시관과 부근 국립광주박물관, 광주극장, 양림동 전시공간 호랑가시나무아트폴리곤에 각각 내용을 달리해 차려졌다. 화정동 옛 국군병원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창조원, 광주문화재단에는 이불, 임민욱, 시오타 치하루 등 국내외 유명작가들이 5월 광주를 떠올리며 만든 근작들을 내놓는 지비(GB:광주비엔날레의 영문 약자)커미션 전이 진행되고 있다. 올해 비엔날레의 주목거리로 떠오른 광주 작가들의 5·18재조명 전 ‘메이투데이’는 지비커미션 전과 옛 국군병원을 전시 장소로 공유하고 성격도 비슷해 보이지만, 따로 구분되는 전시회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창조원과 은암미술관에서는 역사, 기술, 소비 등을 화두로 대만과 스위스, 한국 작가들의 파빌리온 프로젝트가 열리는 중이다.
광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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