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CEO 취임 전 부정은 사임 요구 못해' 못 박은 KT
임기 중 부정행위도 1심 판결까지 방치
2002년 민영화 이후 ‘시이오(CEO·최고경영자) 리스크’에 줄곧 시달린 케이티(KT)가 지난해 시이오의 준법 의무를 강화하면서도 ‘취임 전’ 저지른 부정 행위에 대한 조처 규정은 만들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임기 중’ 저지른 부정 행위도 1심 판결 전까지는 이사회가 책임을 강제하지 않아도 돼, 부정 행위를 한 대표이사도 사실상 임기를 채울 수 있게 한 사실도 함께 드러났다.
■ 이사회와 CEO의 약속의 실체 11일 <한겨레>가 확보한 케이티 이사회와 대표이사 간 ‘경영계약서’를 보면, 케이티 이사회는 대표이사의 부정행위가 있을 경우 이사회 결의로 대표이사에 사임을 요구할 수 있다. 또 대표이사는 이를 수용해야 한다. 이사회 결의만으로 대표이사가 물러나도록 한 셈이다. 주주총회 결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일반적인 회사의 대표 해임 절차에 견줘 이사회의 권한과 시이오의 준법 책임을 강화한 셈이다. 이 경영계약서는 지난해 3월 주주총회에 제출돼 최종 승인됐다.
이사회의 대표이사 사퇴 요구에는 세가지 조건이 달려 있다. ① 임기 중 대표이사 직무와 관련한 불법적 요구 수용 ② 회사에 재산상 손해 발생 ③ 금고 이상의 형 1심 선고다.
세부 조건이 외부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2019년 12월 케이티 이사회는 구현모 당시 사장을 대표이사 최종 후보로 낙점한 뒤 내놓은 보도자료(이하 보도자료)에 “임기 중 법령이나 정관을 위반한 중대한 과실 또는 부정행위가 사실로 밝혀질 경우 이사회의 사임 요청을 (시이오가) 받아들인다. 이를 위해 정관 개정 등 후속조치를 추진한다”라고만 밝힌 바 있다.
■ 허술한 CEO 리스크 통제 장치? 이런 세부 조건은 ‘시이오의 부정 재연 방지’란 케이티 이사회의 의도가 충분히 경영 현장에서 관철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남긴다. 우선 이사회의 사임 요구 권한과 시이오의 수용 의무가 시이오 ‘취임 전’ 저지른 부정 행위가 ‘취임 후’ 드러난 경우에는 발동하지 않도록 돼 있어서다. 한 예로 취임 전 한 부정 행위로 취임 후 법원 1심에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았더라도 시이오는 자진 사퇴를 하지 않는 이상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받아보자”며 버틸 수 있다. 확정 판결 전까지는 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케이티 정관을 앞세워 법정 싸움과 경영 활동을 동시에 하겠다고 나설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뿐만이 아니다. 현 계약서 규정은 ‘취임 후’ 부정행위를 저지르더라도 임기를 온전히 마칠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범죄 행위로부터 1심 선고가 이뤄지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현실 때문이다. 한 예로 최근 검찰이 수사를 재개한 황창규 전 회장 등이 연루된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은, 지난 2018년 경찰 수사로 시작돼 2019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으나 1심 선고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해당 혐의를 받은 행위가 발생한 시점(2014~2016년)을 기준으로 최소 5년이 흐른 셈이다. 그 사이 황 전 회장은 연임 임기를 모두 채우고 퇴임했다. 그는 임기 마지막해 보수 14억원과 퇴직금 14억7천만원도 온전히 받았다. 이와 같은 유사 상황이 재연될 수 있다는 얘기다.
■ 구현모 대표 봐주기였을까? 주목되는 또다른 부분은 ‘이사회 보도자료’와 주총에서 승인된 경영계약서 간의 미묘한 차이다. 이사회 발표에선 시이오 취임 전 위법 행위가 취임 후 1심 선고가 이뤄질 경우에도 이사회에 사퇴 요구 권한과 시이오의 수용 의무가 발생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계약서에선 이런 해석의 여지가 없어서다. 이 때문에 “보도자료는 취임 전에 저지른 불법행위도 사임요청 요건으로 삼았는데 반해 경영계약서는 요건을 크게 완화했다”(케이티 전직 임원)라는 반응도 나온다. 보도자료 발표 이후 계약서 작성까지 2개월 남짓 동안 슬그머니 요건을 완화하는 논의가 있었다는 의심이다.
케이티 쪽은 ‘커뮤니케이션 문제’라고 일축한다. 유희열 케이티 이사회 의장(전 과학기술부 차관)은 <한겨레>에 “처음부터 시이오 재직 중에 저지른 부정행위만 이사회가 문제 삼는 것이었다”고 잘라 말했다. 보도자료 문구를 정확하게 작성하지 않아서 빚어진 오해라는 취지다. 케이티(홍보실)도 같은 취지의 설명을 내놨다.
그럼에도 의구심이 식지 않는 까닭은 현재 검찰 수사 중인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에 구현모 현 대표도 자유롭지 않아서다. 구 대표는 정치자금법 위반 의심을 받는 행위가 벌어질 당시 황창규 전 회장의 비서실장과 경영지원본부장이었다. 경찰도 검찰에 해당 사건을 송치할 때 구 대표도 기소의견으로 제시했다. 결과적으로 검찰 수사선상에 오르거나 기소될 수 있는 구 대표의 처지를 염두에 두고 이사회가 ‘취임 후 불법행위’만 문제 삼았다는 뜻이다.
유희열 의장은 이에 대해 “2019년 말 새 대표를 뽑는 과정에서 구현모 당시 후보는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과는 무관하다는 (사내) 변호사의 설명을 들었다. 경영계약서는 해당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다만 유 의장은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 자체에 대해선 잘 알지는 못한다. 자세한 건 홍보실에 문의해 달라”고 한 발 물러섰다.
열쇳말 :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이란 2014년 5월부터 3년 남짓 동안 회삿돈으로 상품권을 샀다가 되팔아 조성한 현금 11억여원을 다수의 임직원 명의로 99명의 정치인에게 후원금을 준 일이다. ‘쪼개기 후원’ 사건으로도 불린다. 이 사건을 조사한 경찰은 2019년께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김재섭 선임기자, 김경락 기자 j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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