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보가입 의무화 2년..되레 '4중고' 시달리는 이주민
지역가입 노부모·성인자녀 피부양 불가
UN "한국 제도 악영향" 개정 권고
매달 25만8천원씩 내야 하는 가족의 건강보험료(건보료)는 20대 인도적 체류자 ㄱ씨에게 큰 부담이다. 그는 할머니, 부모와 형제들 등 가족 6명의 생계를 홀로 책임지고 있다. 아버지는 장애가 있고, 어머니는 미성년자인 동생들을 돌봐야 해서 일을 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정부가 2019년 7월부터 이주민의 건강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면서, ㄱ씨 가족에겐 20만원이 훌쩍 넘는 건보료가 청구됐다. 내국인과 달리 이주민은 노인 부모와 19살이 넘는 자녀의 피부양자 등록에 제한이 따른다. ㄱ씨가 본인, 할머니, 부모(동생 포함)에게 저마다 8만6천원씩 3중으로 부과되는 건보료를 감당해야 하는 이유다. ㄱ씨는 “차라리 이주민이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않아도 됐던 때가 더 나았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주민 건보료 부담 30.6%↑…내국인의 4배
이주민의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2년 전부터 이주민 건강보험 가입을 의무화했지만, 차별적인 보험료 부과 기준으로 많은 이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로 일자리를 잃거나 실직 위기에 놓인 이주민이 늘면서 이들에 대한 건보료 부과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는 상황이다.
11일 국가인권위원회의 ‘이주민 건강권 실태와 의료보장제도 개선방안 연구’ 보고서를 보면, 이주민의 건보 가입이 의무화된 2019년 외국인 가구의 월평균 보험료는 전년(2018년)보다 30.6% 높아졌다. 한국인 가구의 보험료 인상률이 7.1%였던 것에 견주면 4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인권위는 사단법인 ‘이주민과 함께’에 연구용역을 의뢰했고, 이 단체는 국내 거주 중인 이주민 105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뒤 이 보고서를 마련했다.
이주민의 건보료 부담이 커진 것은 정부가 이주민 건강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면서 보험가입자의 소득을 근거로 책정한 건보료와 전년도 전체가구당 평균보험료(2019년 12만3080원) 중에 금액이 많은 쪽을 부담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외국인의 자산과 소득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런 방식으로 제도를 바꾼 것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외국인은 국내에 소득·재산이 없거나 파악하기 곤란한 경우가 많아, 내국인 가입자가 부담하는 평균보험료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주민의 월평균 근로소득은 147만원(2017년 기준)으로 내국인의 67% 수준에 불과하다. 전체 인구의 평균보험료를 기준으로 이주민의 건보료를 책정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주민 지역가입자 비율 높아…피부양자 인정도 못 받아
이주민 가족의 세대 개념을 내국인과 다르게 적용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이주민은 노인 부모와 만 19살이 넘은 자녀를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없다. ㄱ씨처럼 한 가구에 이중·삼중으로 건보료가 부과되는 이유다.
이주민은 내국인보다 지역가입자의 비율도 높다. 2020년 7월 기준, 한국인은 국민건강보험 지역가입자 비율은 26.8%지만, 이주민은 43.4%로 집계됐다. 건강보험은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로 나뉜다. 이주민의 지역가입자 비율이 높은 것은 임시직·일용직으로 일하거나 사업장에서 직장가입을 해주지 않는 5인 미만 소규모 일자리에서 일하는 이들이 많아서다.
이처럼 불안한 고용상태에 놓인 이주민들은 코로나19 사태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 2020년 이주민 건보 가입자 통계를 보면, 직장가입자 수는 전년보다 1만4206명이 줄었고, 지역가입자 수는 8793명이 늘었다. ‘이주민과 함께’ 연구진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이주민의 실직이 증가하면서 직장가입 자격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직장가입 자격을 잃게 되면 건보료 부담이 늘 수밖에 없다. 회사와 가입자가 건보료를 절반씩 부담하는 직장가입자와 달리, 지역가입자는 전액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주민도 예외는 아니다. 이주민 직장가입자 가운데 가구 건보료가 20만원 이상인 경우는 8.8%였지만, 지역가입자 중에선 33.3%가 20만원 이상 건보료를 내는 것으로 집계됐다. ‘돈이 없어서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했다’고 응답한 이주민 지역가입자도 27.4%로 직장가입자(3.5%)보다 일곱배 이상 많았다.
■긴급지원금으로 건보료 납부…아파도 치료는 못 받아
이주민들에게 건보료 납부는 중요하다. 건보료 체납이 계속될 경우 체류자격을 잃고 쫓겨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주민의 건강보험 가입을 의무화한 정부는 50만원 이상 건보료를 체납한 이주민의 정보를 법무부에 넘기고, 체납이 3차례 이상 반복되면 체류연장을 제한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이에 이주민 중 일부는 재난지원금으로 건보료를 납부하기도 한다. 고관절 수술을 받고 일을 하지 못해 수입이 없는 중국 동포 ㄴ(54)씨는 소득 하위 70% 이하 가구에 지원하는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을 수 없었다. 정부는 건보료 납부액으로 소득 수준을 판단했는데, 이주민 직장가입자인 ㄴ씨의 건보료만 보고 그가 평균 수준의 소득이 있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ㄴ씨는 정부 지원금은 받지 못했지만, 지역 복지센터에서 민간기금으로 지원금 40만원을 받고는 “이제 몇달 치 건보료를 낼 수 있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의무적으로 건강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 체류 자격을 잃을 위기로 내몰리는 이주민들도 있다. 캄보디아 노동자 ㄷ씨는 “건보료를 납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농장주의 말을 믿고, 건보료 130만원을 체납했다가 2020년 8월 건보공단으로부터 압류통지서를 받았다. 인도네시아 노동자 ㄹ씨는 “건강보험 가입이 의무고, 건보료를 내지 않으면 체류연장에 제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주민 함께’의 이번 설문조사 중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연구진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건보 가입이 의무화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주민은 64.3%, 건보료 체납으로 체류자격이 제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주민은 59.1%에 불과했다.
건보 가입 의무화는 이주민을 위한 정책이지만, 정작 이주민은 열악한 노동 조건과 언어 장벽 탓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세밑 한겨울 비닐하우스에서 목숨을 잃은 캄보디아 노동자 속헹과 같이 건강에 문제가 있어도 진료를 받지 못하는 ‘미충족 의료율’은 28.2%로 나타났다. 한국인(11.5%)의 두배가 훌쩍 넘는 수치다. 농업 분야에서 일하는 이주민의 미충족 의료율은 62%에 이르렀다. 진료를 받지 못하는 이유로는 ‘비용이 부담돼서’(54.1%), ‘시간이 없어서’(37.4%), ‘증세가 가벼워서’(36.4%), ‘의료진과의 의사소통이 어려워서’(27.9%) 등으로 나타났다.
■“독일·일본·대만, 사회보험 국가 이주민 차별 안 해”
한국과 비슷한 사회보험 형태의 의료보장제도를 가진 독일, 일본, 대만의 이주민 건강보험은 어떨까. 연구진은 “보험료 산정, 세대원과 피부양자 인정, 보험료 체납 중 보험급여 제공 등과 관련해 한국처럼 국적이나 체류자격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하는 사례는 없었다”며 “국가는 모든 개인에 대하여 국적과 관계없이 평등하게 조약상 인정되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이주민의 건강권도 차별 없이 보장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엔(UN) 인종차별 철폐위원회는 한국의 건보제도가 이주민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 표명하면서 “모든 이주민이 내국인과 동일한 수준의 보험료를 납부하고 건보 적용을 받을 수 있게 제도를 개정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이주민 건강보험제도 차별폐지를 위한 공동행동’은 2019년 말 개정 외국인 건보제도의 위헌 여부를 묻는 헌법소원심판을 제기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추가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면 지속적으로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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