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을 칠하니 삶이 다시 움직였다" 93세에 첫 전시 연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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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을지로 허름한 다락 같은 공간에서 작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 작은 전시의 주인공은 그림을 배운 적 없는 김옥희(93) 할머니다.
할머니의 색은 아이의 것처럼 밝다.
손주와 할머니의 협업 전시 '우리 외할머니'는 서울 을지로 복합문화공간 '을지다락'에서 4월 말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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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을지로 허름한 다락 같은 공간에서 작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아이가 그렸을 법한 그림들이 몇점 걸려 있고, 서투른 바느질 솜씨로 만든 인형과 소품이 군데군데 매달려 있다. 찾는 이도 많지 않다. 이 작은 전시의 주인공은 그림을 배운 적 없는 김옥희(93) 할머니다.
김 할머니는 북한 함흥 출신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전쟁 통에 맨몸으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같은 실향민이었던 할아버지를 만나 경기 포천에 자리를 잡았다. 부부는 2남2녀를 낳아 길렀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집 근처에 전나무를 심고 가꿨다.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부부는 대체로 행복했다. 자식들은 잘 컸고, 손주들은 늘어났다. 부부가 가꾼 전나무 숲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손주인 정민기(36)ㆍ희기(35) 남매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주말이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가꾼 숲에서 마음껏 뛰어놀았다”라며 “항상 할머니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줬던 기억들로 가득하다”고 말했다.
다복했던 할머니의 삶은 지난해 할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함께 멈췄다. “평생 할아버지 삼시 세끼를 정확한 시간에 맞춰서 챙기고, 자식에 헌신하면서 사셨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식사도 거르시고, 삶의 의욕을 잃으신 것 같았어요.”(정민기)
멈춘 삶을 다시 움직인 건 손주들의 그림이었다. 작가로 활동 중인 정 남매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할머니에게 꽃과 동물, 도형 등을 그려줬다. 색은 입히지 않았다. 할머니의 몫이었다. 할머니는 손주의 그림에 하루에 서너 시간씩 칠을 했다. 선명한 파랑, 밝은 빨강, 개나리처럼 눈부신 노랑 등 색의 향연이 펼쳐졌다.
“할머니가 완성한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손재주가 뛰어나신 줄은 알았지만 색의 배합이나 색감이 너무 아름다웠거든요. 처음에 72색 색연필을 드렸었는데, 부족하다고 해서 120색으로 바꿔드렸어요. 할머니 안에 이렇게 많은 색이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죠.”(정희기)
할머니에게 색은 행복한 기억이다. “북한에서 소학교 교사를 했었어요. 색을 칠하다 보니 아이들과 풍금을 치고,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떠올랐죠. 그때는 크레파스 색이 다섯 가지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어찌나 재미났던지. 포천에 떨어져있던 낙하산 천으로 제 아이들 옷을 만들어 입힌 기억도 났어요. 손주들이랑 꽃밭에서 뛰어논 기억도 나고요. 색을 칠하면서 내 평생 즐겁고 행복한 감정들이 쏟아져 나오더군요.”(김옥희)
할머니의 색은 아이의 것처럼 밝다. “할머니는 내면에 힘든 시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밝은 것만 보여주려고 하셨어요. 본인 스스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표출하기보다 밝은색으로 바꾸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정희기)
작품을 활용해 만든 기념품 판매 수익으로 할머니는 고마운 이들에게 그의 색이 담긴 이불 한 채씩 선물하고 있다. 벌써 16채다. 소감을 물었다. “손주 덕에 내가 이 나이에 돈을 다 벌어요. 재미있습니다. 뭘 더 바라겠어요.”(김옥희)
손주와 할머니의 협업 전시 ‘우리 외할머니’는 서울 을지로 복합문화공간 ‘을지다락’에서 4월 말까지 열린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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