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세계어가 된 내로남불
로마자로 표기한 한국어 중 처음 접한 단어가 불고기(bulgogi)였다. 한국이 내세울 것 없던 시절, 외국인에게 “어떤 한국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조건반사처럼 돌아오던 단어이기도 했다. 김치(kimchi), 소주(soju), 온돌(ondol) 등도 그런 단어다. 우리 문화를 알파벳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해 딱히 좋거나 싫지 않았다.
▶반면 재벌(chaebol)은 번역 가능한 단어인데도 한국식 표현을 그대로 썼다. 1972년 처음 외신에 등장했으며 웹스터 사전·옥스퍼드 사전에 표제어로 정식 등재된 어엿한 세계어다. ‘기업 집단’이란 뜻의 conglomerate와는 느낌이 크게 다르다. 뉴욕타임스는 재벌의 특징으로 ‘군대식 독재’와 ‘가족 간 원한’ ‘탐욕’ ‘오만’ 등을 꼽는다.
▶세계어가 된 한국어는 ‘세계인의 눈’이란 거울에 비친 한국의 초상이다.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몇 해 전 ‘땅콩 회항’ ‘물컵 투척’ 사건이 터졌을 땐 ‘갑질’(gapjil)이 외신을 탔다. ‘일터에서의 괴롭힘’(workplace harassment)으로 번역하면 갑질의 인격 모독적 뉘앙스가 담기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썼다고 한다. 약자를 함부로 대하는 우리 사회의 치부를 드러낸 단어다. 지난해 BBC는 택배 노동자가 사망한 뉴스를 전하며 이유를 ‘과로사’(kwarosa)라고 했다. ‘꼰대’(kkondae)도 ‘old man’이나 ‘senior citizen’으로 옮기면 ‘어린 사람을 가르치려 드는 나이 먹은 사람’이란 부정적 느낌이 사라진다.
▶한류 붐과 K팝은 정반대 기여를 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 덕분에 ‘오빠’(oppa)와 ‘강남’(gangnam)은 세계인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른 한국어가 됐다. ‘언니’(unnie)도 덩달아 떴다. 전 세계 K팝 팬들은 BTS·블랙핑크의 노래를 따라 부르려 알파벳으로 한국어 가사를 적어 외운다. ‘돌민정음’이라 한다. 아이돌에 훈민정음을 합성한 신조어다.
▶엊그제 뉴욕타임스가 4·7 재보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소식을 전하며 ‘내로남불’을 이유로 꼽았다. ‘double standard(이중 잣대)’로 번역하지 않고 ‘naeronambul’ 그대로 썼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한국 여당의 이중 잣대’란 의미일 것이다. 선관위가 특정 당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사용을 금지했는데, 그 고유성이 세계적 지위를 획득한 셈이다. 코로나 4차 대유행 경고가 나오는데 백신 확보는 더디기만 하다. 이러다 K방역도 ‘백신 없이 국민만 옥죄는’ Kbangyeok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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