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이 할퀸 상처.. 친구들과 부대끼며 치유한다

대전/글·사진 하지수 조선에듀 기자 2021. 4. 12.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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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치유기관 '해맑음센터'를 가다

지난 1일 봄이 내려앉은 대전의 계족산. 여섯 명의 고등학생이 체험학습차 이곳을 찾았다. 삶의 여정처럼 쉼 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과 내리막길. 학생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탈길에 넘어지는 일도 있었지만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났다. 때로는 걸음을 멈추고 분홍빛 꽃과 눈을 맞추기도 했다.

이들은 최근 국내 유일의 기숙형 학교폭력(학폭) 피해 학생 치유기관인 해맑음센터에 지원해 들어온 학생들이다. 센터는 학생들에게 오르막길을 오르던 중 만난 그늘이었다. 동시에 같은 아픔을 겪은 또래가 서로를 위로하며 상처를 치료하는 쉼터였다.

국내 유일의 학폭 피해 학생을 위한 기숙형 치유기관 해맑음센터.

“내 말 들어주는 친구 만나 기뻐”

학폭이 발생하면 흔히 가해자를 처벌하고 비난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그 사이 피해 학생의 치유와 회복 문제는 뒤로 밀려나기 일쑤다. 그러나 청소년기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곪은 상처는 성인이 돼서도 피해자들을 아프게 한다. 최근 잇따른 ‘학폭 미투’(유명인의 학폭 가해 사실을 고발하는 운동)가 이를 보여준다.

대전의 해맑음센터는 학폭으로 인한 상처가 온전히 아물 수 있도록 돕는다. 학생들은 짧게는 2주, 길게는 1년 정도 센터에 머물며 마음을 추스르고 일상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한다. 이 기간 원래 다니던 학교에서도 출석을 인정받을 수 있다.

2013년 개소 이래 해맑음센터를 거쳐 간 학생은 총 311명이다. 올해는 서울과 광주, 충북 진천 등에서 6명의 고등학생이 들어왔다. 이들은 국어·영어·수학·한국사 등 기초 교과목을 배우고 개인·집단상담, 예술 치유 활동, 현장체험학습을 이어 나가고 있다.

기자가 센터를 찾은 날에는 산을 탐방하는 현장체험학습이 이뤄졌다. 차용복 부장은 “체육 활동은 스트레스나 우울감을 없애고 자신감도 키워준다”며 “함께 땀을 흘리고 운동하는 사이 친구들 간의 사이도 더욱 가까워진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은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산에 올랐다. 누군가 뒤처질 때면 선두에 선 고 3 학생이 멈춰 서 외쳤다.

“할 수 있어, 조금만 더 힘내자!”

2시간의 산행 끝에 다다른 정상. 땀에 흠뻑 젖은 채 장난을 치며 웃는 학생들의 모습은 여느 또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울에서 온 고등학교 3학년 A군은 “센터에 들어올 때만 해도 너무 힘들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며 “막상 지내다 보니 내 말에 귀 기울이고 공감해주는 친구들이 있어 든든하다”고 말했다.

이동원 상담지원팀장은 “누군가 나를 지지하며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다고 느끼는 것부터가 치유의 시작”이라면서 “센터에서는 또래와의 관계를 통해 학폭을 당한 뒤 깨진 사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한다”고 말했다.

지난 1일 계족산을 찾은 해맑음센터 학생들이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산을 오르고 있다.

걷어내도 다시 찾아오는 먹구름

즐겁게 웃다가도 학생들의 마음에는 불쑥불쑥 먹구름이 찾아온다. 화장실에서 폭행을 당했던 순간이 떠올라 세면대를 붙잡고 우는가 하면 사이버폭력의 상처로 스마트폰을 든 사람만 마주쳐도 공황장애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 팀장은 “한번은 다 같이 길을 걸어가는데 아이들이 동시에 골목길로 확 숨더라”며 “맞은편에서 교복 입고 걸어오는 학생들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미한 성폭력이 없듯, 경미한 학폭도 없다”며 “피해자들은 학교를 벗어나도 생활 전반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으로 고통스러워 한다”고 했다.

학생만큼이나 힘든 건 부모도 마찬가지. 과거의 기억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녀의 모습을 보며 자책감과 답답함을 동시에 느낀다. 안타까운 마음에 “이제는 그만 털어내라”며 다그치다 부모와 자녀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해맑음센터는 이러한 일을 막고 자녀의 정서 회복을 돕는 방법을 일러주기 위해 부모에게도 월 2회씩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도록 한다.

해맑음센터에서는 비언어적 체험활동을 통해 학폭 피해 학생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자신감을 키우도록 이끈다.

마음에 햇빛이 들 때까지

피해 학생의 효과적인 치유와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제도상의 변화도 이뤄져야 한다. 지난달 29일 기준 가해자와 분리된 피해 학생 전담 지원기관 수는 139곳. 2017년 조사 때(28곳)보다 5배가량 늘었지만 단순 상담 기능만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학교 가기를 두려워하는 학폭 피해 학생들은 상담이 이뤄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집에서 은둔형 외톨이로 지낼 수밖에 없다. 학교에 준하는 시설을 확충해야 하는 이유다.

“학교로 복귀할 때의 지원 시스템도 필요해요. 우리가 바라는 지원 시스템은 그리 거창하지 않아요. 학교에 제대로 적응할 때까지 배려심 있는 학생을 짝으로 붙여줘 급식이라도 혼자 먹지 않게 해달라는 거예요. 학교의 배려는 아이들이 다시 학교에 마음을 붙이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차 부장)

담임의 해맑음센터 방문도 큰 힘이다. 학교에 자신을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복교할 용기를 얻을 수 있어서다. 차 부장은 “담임선생님이 수업으로 바쁘다면 교장선생님이라도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해맑음센터에서 나가는 날 기대하는 본인의 모습을 물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학생들은 “자신감을 되찾고 싶다” “남의 눈치를 덜 봤으면 좋겠다” “부모님을 웃게 해주고 싶다” 등의 대답을 내놨다.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 벽에 붙은 학생의 자작시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내 가슴은 댐처럼/흉한 마음을 가둔다/하늘이 우울을 쏟아부으면/흉한 마음이 흘러넘친다/넘쳐난 마음에 풀꽃도 쓸려나간다/다시 해가 뜨면/내 가슴도 맑아져/황폐하지만 아름다운 땅이 모습을 드러내겠지.’ 학생들은 마음에 햇빛이 들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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