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뼈 세우고 배에 힘!".. '발린이'가 늘고 있다

박돈규 기자 2021. 4. 1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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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승무원·은행원도 발레 열풍
지난 6일 오전 부천 라온발레스튜디오 '레벨1' 강습실 풍경. 최근 몇 년간 발레에 입문하는 성인, 이른바 '발린이'가 늘고 있다. /부천=김연정 객원기자

한쪽 벽 전체가 거울인 강습실 밖으로 클래식 음악이 새어나왔다. 지난 6일 오전 11시 50분 경기도 부천 라온발레스튜디오. 시간표에는 ‘레벨 1’이라 적혀 있다. 레오타드를 입은 수강생 7명이 바(barre)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상체를 펴면서 스트레칭을 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가슴 펴고, 어깨 내리고, 꼬리뼈 세우고, 허벅지 안쪽에 힘 주고, 무릎 붙이고, 목은 길게 빼고, 배에 힘!”

이들은 요즘 유행어로 ‘발린이(발레+어린이)’. 주식시장의 주린이 같은 존재다. 몸에 묵은 습관을 버리고 걸음마부터 새로 익히는 발린이가 많아졌다. 라온발레스튜디오 김보라 원장은 “코로나로 작년엔 주춤했지만 최근 몇 년간 성인 회원이 해마다 10~20% 증가하는 추세”라며 “봄에 운동 수요가 생겼고 드라마 ‘나빌레라’ 효과가 겹쳐 지난달부터 문의가 부쩍 늘었다”고 했다.

운동 겸 예술, 성격도 밝아져

tvN이 방송 중인 ‘나빌레라’는 칠순에 어릴 적 꿈이던 발레에 도전하는 덕출(박인환)과 무의미한 삶을 살다 그의 발레 선생님이 된 청년 채록(송강)의 성장 드라마다. 인기 웹툰이 원작. 5월 14~30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나빌레라’를 뮤지컬로 공연하는 서울예술단은 “꿈이 있는 모든 사람을 응원하는 작품으로 2019년 초연부터 대중성을 입증했다”며 “취미 발레층을 겨냥한 마케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6일 경기도 부천 라온발레스튜디오 ‘레벨1’ 강습실 풍경. 발레에 입문하는 성인, 이른바 ‘발린이’가 늘고 있다. 한 발린이는 “드라마 ‘나빌레라’에서 70대에 발레를 배우며 땀이 송글송글 맺힌 덕출(박인환)의 모습이 수업 중의 나 같았다”고 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8개월 차 발린이 김소영(28)씨는 전직 외국계 항공사 승무원. 코로나로 갑자기 실업 상태에 놓이자 몸과 마음이 처졌다고 한다. 그녀는 “이 위기를 타파하려면 새로운 경험이나 자극이 필요해 발레를 시작했다”며 “전신 운동이라 80분 수업이 끝나면 기어서 집에 오다시피 하지만, 뭔가 배우면서 성취하는 기분은 오랜만이라 심리적으로 밝아졌다”고 했다.

발린이 최은정(49·주부)씨는 취미로 실내 암벽등반을 할 때 ‘절벽에서 하는 발레’라는 말을 들었다. 발레에 도전해보니 암벽등반보다 운동량이 몇 배 더 많았다. 그녀는 “발레가 몸은 힘들어도 아름답고 재미있어 생활의 중심이 됐다”며 “거울로 나를 오래 바라보면서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말했다. 발린이 남승희(36·주부)씨는 “아이들이 태어난 후 나만의 시간을 갖기 어려웠는데 육아 스트레스를 발레로 풀었다”며 “그랑 점프와 더블 턴을 좀 더 깨끗하게 하는 게 올해 목표”라고 했다.

국립발레단이 4월 27일~5월 2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는 '라 바야데르'. 국립발레단은 발린이를 관객으로 흡수하기 위해 올해 모든 정기공연의 회차를 1회 더 늘렸다. /국립발레단

발레 관객 늘고 직접 공연도

네이버 지도에서 ‘성인발레’로 검색하면 서울에만 학원 약 200곳이 뜬다. 업계에 따르면 수강생은 30~40대 여성이 가장 많고 소수지만 남성도 늘고 있다. 대체로 낮에는 대학생과 주부, 저녁엔 퇴근한 직장인이 발레를 배운다. ‘입문 클래스 상시 개강’ ‘점심 시간 직장인 발레’ 같은 홍보 문구도 보인다.

발린이 증가는 공연 시장에도 영향을 준다. 국립발레단은 ‘라 바야데르’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 올해 정기공연의 회차를 기존 6회에서 7회로 1회 추가했다. 국립발레단 김현아 홍보팀장은 “코로나로 객석이 축소된 탓도 있지만, 발레를 취미로 배우는 관객이 늘어나는 추세를 감안한 것”이라고 했다.

태권도장에 흰 띠부터 검은 띠까지 수직적 단계가 있듯이 발린이도 ‘기초’부터 ‘레벨 1’ ‘레벨 1.5’ ‘레벨 2’ ‘레벨 3’ 등으로 성장해 나간다. 아마추어 고수들이 모여 공연도 한다. 2017년 창단한 스완스발레단 곽윤아 예술감독은 “작년 가을 입단 경쟁률은 3대1이었고 의사·승무원·은행원 등 직업이 다양하다. 5월 공연을 앞두고 요즘엔 주 4회 저녁에 연습한다”고 했다.

한 발린이는 발레에 대해 “구부러졌던 몸이 곧게 재정렬되는 체험”이라고 했다. ‘아무튼, 발레’를 펴낸 최민영씨는 “피곤한 날에도 홍삼 한 포 털어넣고 학원에 가서 마지막 힘을 쥐어짠다”며 “취미 발레에 빠진 사람들은 발레 학원비 벌려고 직장 다니고, 퇴근해서 발레 하려고 아침에 출근한다”고 썼다. 가슴 펴고, 꼬리뼈 세우고, 배에 힘!

인기 웹툰을 드라마로 옮긴 '나빌레라'. 한 발린이는 "70대에 발레를 배우며 땀이 송글송글 맺힌 덕출(박인환)의 모습은 수업 중의 나 같았다"며 "한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건 해보며 살자"는 감상평을 남겼다.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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