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비록 농담이겠지만
[경향신문]
이웃 산골 마을에 귀농한 젊은 부부가 아기를 안고 우리 집에 놀러왔다. 할머니들이 아기를 가만히 보더니 신기한 듯이 말씀을 늘어놓으셨다. “아이고, 오늘 귀한 거 보네야.” “맞다 맞아. 산골에서 몇십 년 만에 보는기고.” “야야, 이래 귀한 거는 돈 주고 봐야 한다니까.” 할머니 몇 분이 정말 만 원짜리를 아기 손에 쥐여주시며 덕담까지 해주셨다. 처음엔 ‘귀한 거’란 게 무얼 말하는 건지 잘 몰랐다. 다 듣고 나니까 ‘귀한 거’란 게 아기라는 것을 알았다. 농촌에서 얼마나 아기 보기가 어려웠으면 돈을 주고 봐야 할 만큼 귀한 보물이 되었을까. 그 말씀이 비록 농담이겠지만 어쩐지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16년 전에 황매산 자락 나무실 마을에 귀농을 하여 뜻있는 농부들과 모임을 만들었다. 가까운 이웃 마을에 나보다 먼저 귀농한 젊은이도 있고, 뒤따라 귀농한 젊은이도 몇몇 있어 우리 집에서 여섯 사람이 첫 모임을 가졌다. 한 달에 한 번,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모임을 갖기로 하고, 참석하는 사람은 모두 반찬을 한 가지씩 가져오기로 했다. 모임을 준비하는 가정은 부담 없이 밥만 지으면 된다. 그리고 내가 사는 마을이 ‘나무실’이라 자연스럽게 ‘나무실공동체’라 모임 이름을 지었다. 날이 갈수록 귀농한 젊은이들이 늘어남에 따라 ‘열매지기공동체’라 이름을 바꾸고, 가족이 함께 참석하기로 했다.
모임 때는 가장 먼저 한 달 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눈다. 대부분 농사 이야기가 많고, 집안일과 걱정거리를 함께 나누기도 한다. 나는 모임 때마다 이 시간이 가장 좋다. 공동체 식구들을 통해 나를 들여다볼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깊이 알게 될수록 함께 희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달마다 안건을 올려 토론하고 결정한다. 그동안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 방문, 제주강정마을해군기지건설반대대책위와 서울 철거마을 농산물 전달, 세월호 참사 현장 방문, 물대포를 맞고 돌아가신 백남기 농민 진상규명 집회 참석과 같은 일을 함께하면서 정이 더욱 깊어졌다.
더구나 산골 아이들과 함께 놀 수 있는 ‘강아지똥학교’와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담쟁이인문학교’를 만들기도 하고, 청년 농부들에게 해마다(3년 동안) 조건 없이 100만원을 지원하기 위해 ‘청년 농부 지원금’ 통장을 만들었다. 도시에 사는 뜻있는 분들이 기부를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공동체 식구들 스스로 이름을 밝히지 않고 기부를 한다. 이 중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뜻을 모아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리 작은 일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은 공동체 식구들이 여덟 가구(22명)다. 그 가운데 청년 농부 정구륜(20), 김수연(24), 김예슬(28) 님은 농사지으며 꿈을 키우고 있다. 농촌이 농사만 짓는 농장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마을이 될 수 있도록 오늘도 책을 읽고, 시를 쓰고, 기타를 치고, 토종종자 모임을 만들어 쉬지 않고 공부하고 있다. 나는 가끔 산밭에서 청년 농부들과 일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동지들, 이런 산골에서 나는 참 복도 많다야. ‘귀한 거’ 자주 본다야. 돈 주고 봐야 하는 거 아이가?” 아기만큼이나 청년이 귀하니까 말이다.
서정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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