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용산 야구장’을 보고 싶다

강호철 스포츠부장 2021. 4. 1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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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미군 부지 안 야구장… 정부, 공연장으로 바꿀 계획
있는 시설 굳이 철거 말고 도심 운동공원으로 활용을
서울N타워 전망대에서 바라본 용산 미군기지 일대./이태경 기자

강남 고속터미널 부근에 위치한 초등학교는 대각선으로 달려야 겨우 100m달리기 규격을 채웠다. 터미널이 완공되기 전, 한 시간 내내 오가는 차가 열 손가락 아래였던 학교 앞 4차선 도로가 체육 시간 보조 운동장 역할을 했다. 방과 후엔 건너편 공터에 세워진 축구 골대 두 개 사이에서 100명에 가까운 슛돌이들이 한데 엉켜 공을 찼다. 중학교 땐 어렵게 길들인 야구글러브를 들고 동작동 국립묘지 앞 공터로 향했다. ‘전리품’으로 따낸 빙과류 한 개에 땡볕 무더위가 씻은 듯 사라졌다. 어렸을 적 ‘꿈의 구장’들은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우후죽순 자라난 콘크리트 구조물에 파묻혀버렸다. 이젠 축구공 차던 공터엔 여중·고, 야구 방망이 휘두르던 곳엔 지하철역과 대형 주차장이 대신 자리 잡고 있다.

군 생활을 미군 부대에서 했는데, 용산고 옆 작은 부대 안에 잔디 야구장과 (미식)축구장, 야간 조명 시설을 갖춘 옥외 농구 코트까지 있었다. 주말 여가를 운동으로 보내는 미군들이 ‘한국 내 미국’이란 이색적 풍경을 만들어냈다. 최근 야구인들이 ‘용산 야구장을 남겨달라’며 국토교통부에 존치 요청을 했던 바로 그 운동장이었다. 국토교통부의 조성계획안에 따르면 그곳엔 대신 야외 공연장이 들어선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용산공원 부지는 130여년 동안 한국 국민에게 ‘금단(禁斷)의 땅’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온 청나라 군대를 시작으로 일본과 미국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군사 기지로 사용했다.

의미가 남다를 이곳에 야구장을 남겨달라는 요구가 집단 이기주의처럼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야구장이 턱없이 모자란다. 서울만 따져도 엘리트와 동호인 합해 팀이 1만개, 선수가 17만명이 넘는데 고교 운동장까지 합쳐 쓸 만한 야구장은 20여곳 남짓하다. 일선 초·중·고 야구팀은 물론이고 사회인팀들이 주말이면 야구장 찾아 수도권 외곽을 맴도는 ‘메뚜기’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이들로선 새로 만들자는 것도 아니고, 있는 걸 그대로 놔두자는 하소연이라도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철거 운명에 처한 야구장 중엔 미군이 과거 무려 60억원이 넘는 예산을 들여 개보수를 마친 곳도 있다. 클럽하우스, 천연 잔디, 조명 시설, 이동식 펜스 등을 갖추고 있어 조금만 손보면 국제 대회도 유지할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땅값 빼고 야구장 한 면 만드는 데 최소한 10억원 정도 든다고 하니 야구장 6개가 눈앞에서 그냥 사라지는 셈이다.

그리고 서울 시민이 모두 즐겨야 할 게 꼭 야외 공연장만은 아닐 것이다. 시민들이 건강하게 생활 체육을 즐기고, 어린 소년들이 운동선수의 꿈을 키워갈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 용산공원의 롤 모델인 뉴욕 센트럴파크도 30개에 가까운 야구·소프트볼 구장이 있다. 공원 천국인 일본도 도심 곳곳에 ‘운동 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문화’는 되는데, ‘스포츠’는 안 되는 고정관념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린 이미 개발 논리에 휩쓸려 동대문운동장과 부산구덕운동장 등 유서 깊은 스포츠 유산들을 통째로 날려버린 아픔이 있다. 한번 사라지면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선동열 전 야구 국가대표 감독이 일본에서 활약하던 1990년대 중반 일본 현지 출장을 갔다가 본, 휴일 이른 아침 야구 장비 가방을 메고 동네 야구장을 향해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던 소년에 대한 잔상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런 풍경을 용산공원에서도 보고 싶다. 어린아이들이 소중하게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그런 ‘꿈의 구장’을 향해 달려가는 그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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