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의 문화一流] '우리는 국민이다'를 지휘.. 독일 통일의 불씨를 지핀 음악가

박종호 풍월당 대표 2021. 4. 1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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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獨 음악가 쿠르트 마주어, 콘서트홀 첫 공연을 기술자·노동자에게 헌정
민주화 시위대 피신 공간으로 공연장 내주고 음악으로 위로·격려
뉴욕 필하모닉 등 세계 무대 누빈 뒤 라이프치히 시민으로 돌아와

한때 동독이었던 라이프치히는 유럽에서도 매력적인 장소다. 이곳은 학문과 예술의 도시다. 철학자 라이프니츠와 문호 괴테가 공부하였으며, 바흐와 멘델스존과 슈만의 흔적이 짙게 밴 곳이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장소는 도심 한복판에 있다. 동독 시절에 카를 마르크스 광장으로 불리던 거대한 아우구스투스 광장에는 게반트하우스라는 압도적인 건물이 서있다. 동독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랜 관현악단인 명문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홈그라운드이기도 하다.

게반트하우스는 직물회관이라는 뜻이다. 과거 중부 유럽의 대표적인 무역 도시였던 라이프치히에는 섬유를 취급하는 제조업자나 상인이 많았는데, 그들이 도시 경제의 주축이면서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하였다. 상공인들이 세운 회관 건물이 게반트하우스이며, 1781년에 그들은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도 창설하였다. 즉 이 악단은 왕족이나 귀족들이 만든 궁정 악단들과는 다른, 시민 계급이 힘을 모아 세운 최초의 시민 오케스트라였다.

쿠르트 마주어가 2008년 MITO 페스티벌에서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모습(왼쪽 큰 사진). 그는 세계적인 음악가이면서 조국 민주화와 통일의 불씨를 댕긴 주역으로 추앙받고 있다. 라이프치히 광장에 민주화 시위대가 운집했을 때(오른쪽 위 사진) 공연장을 피신 공간으로 내줬고, 현대식 공연장 게반트하우스(오른쪽 아래 사진)가 완공됐을 때는 기술자와 노동자에게 첫 공연을 바쳤다. /MITO 페스티벌·독일연방문서보관소·위키피디아

지금의 게반트하우스는 세 번째로 지어진 건물로서 1977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게반트하우스의 음악 감독이었던 동독의 대표적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 1927~2015)가 호네커 서기장에게 건물 신축을 청원했다. 이에 호네커는 동독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대외적인 선전을 위해 현대적 콘서트홀을 건립해주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마주어의 팬이었던 호네커가 그를 위해 지어준 선물이라고도 말하였다.

새 게반트하우스는 1981년 10월 8일 마주어가 지휘하는 콘서트로 개관할 예정이었으며, 호네커 등 국가 수뇌부가 참석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마주어는 그들이 오기 전날 음악회를 열어버렸다. 공사에 참여했던 기술자와 노동자와 직원들을 초대하여 먼저 최초의 역사적인 연주를 해버린 것이다. 마주어는 인민이 세운 콘서트홀의 첫 연주는 마땅히 인민 대중의 몫이어야 한다며 실천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호네커의 독재가 심해지고 인민에 대한 탄압이 늘어나자, 다음 해인 1982년부터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에는 뜻있는 시민들이 모여서 동독의 자유민주화를 염원하는 기도회를 열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계속되었고, 모임에 참석하는 숫자도 점점 불어났다. 당국은 길을 막는 등 기도회를 방해하였지만, 도리어 기도를 마친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행진하였다. 비밀경찰의 위협에도 기도회와 촛불 행진은 멈추지 않았고, 점점 다른 도시로 번져나갔다. 그렇게 7년이 흘러갔다.

1989년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을 맞아서 열린 주말 시위에 7만명이 카를 마르크스 광장에 운집하였다. 동독 정부는 8000명의 군대 병력을 투입하였고, 3000명을 체포하였다. 호네커는 천안문 사태처럼 발포할 수 있다며 위협하였고, 긴장은 고조되었다.

이틀 후 10월 9일 월요일이 되었다. 게반트하우스의 음악 감독 마주어의 집에 저명한 시민 6명이 대표로 모여서, 그날 예상되는 유혈 사태를 방지할 방도를 의논했다. 저녁이 되어 엄청난 시위대가 광장에 운집하자, 게반트하우스의 문이 열렸다. 총격에서 시위대를 피신시키고자 마주어가 개방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시민들의 자유 토론이 벌어졌고, 마주어는 그들에게 평화적 시위를 외쳤다. 이어 마주어는 게반트하우스에서 지휘봉을 들어 시위대가 주제곡처럼 부르던 노래 ‘우리는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를 열정적으로 지휘하였다.

이제 민주화를 향한 흐름은 봇물처럼 터졌다. 정확히 한 달 후인 11월 9일에 드디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 정권은 스스로 종말을 선포했다. 그 모든 것이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마주어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심지어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다. 그 말을 들은 마주어는 “내가 그 정도로 나쁜 사람입니까?”라며 웃었다.

1991년 미국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새로운 상임 지휘자로 마주어를 선임하자 모든 사람이 예상외의 결정에 놀랐다. 공산 동독의 시골에서 지휘하던 그가 뉴욕이라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중앙으로 가게 된 것이다. 뉴욕으로서는 공산 세계를 무너뜨린 이 상징적인 인물이야말로 그들의 새로운 지휘자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마주어는 10년간 뉴욕에서 지휘자 생활을 하였고, 그 후로는 독일의 지방 지휘자가 아니라 세계적인 명사가 되어있었다. 이후로 그는 런던과 파리에서 세계 정상급 악단을 이끌기도 하였지만, 결국 그는 30년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라이프치히의 시민으로 돌아갔다. 공산 독재 아래에서 대부분의 음악가가 악보 뒤에 숨어서 연주만 하고 몸을 사릴 때, 마주어는 분연히 일어나서 혁명가나 정치가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던 것이다.

현재 라이프치히에는 멘델스존이 살던 ‘멘델스존 하우스’가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이 집의 일부가 ‘쿠르트 마주어 기념관’이 되었다. 현대 지휘자의 기념관은 유럽에서도 흔치 않은 경우다. 그곳에는 마주어의 음악적 경력뿐만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에 앞장서고 나아가 통일에 기여했던 한 용감한 민주시민으로서의 그가 전시되어 있다.

음악가 중에는 음악만 알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음악가는 세상을 알아야 진짜 예술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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