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 밀렸나.. 존재감 약해진 '백신수장' 정은경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하고 자유로운 일상생활을 누릴 수 있는 시기는 과연 언제일까. 정부는 11월까지 집단면역을 달성해 일상을 회복하겠다고 말하지만 의료계에선 고개를 갸웃하는 분위기다. ‘11월보다 상당한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상 회복의 가장 중요한 열쇠인 백신 접종률(약 2.2%)이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히 뒤처질뿐더러 최근에는 ‘4차 대유행’이 시작되고 있어 방역 체계에 커다란 부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은경 청장 “일상 회복은 일러도 내년 이후”
그동안 ’11월 집단면역'을 집중적으로 강조해 온 방역 당국에 최근 변화의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지난 9일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 등이 주최한 온라인 포럼에 참석해 ‘자유로운 일상은 언제쯤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정 청장은 그러자 “현재까지는 접종률이 낮기 때문에 접종률을 높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접종을 받더라도 (코로나) 차단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면역 지속 기간이 어떻게 되는지 불확실성이 있기 때문에 마스크 착용이나 사회적 거리 두기 같은 조치를 연말까지는 진행해야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자유로운 일상에 대해서는 “접종률이 높아진 이후의 상황 변화를 봐야 한다”고도 했다.
주요 정부 인사들은 그동안 ’11월 집단면역'만을 집중적으로 강조하며 올해 중 일상 회복이 가능한 것처럼 말해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도 “정부는 상반기 1200만명 접종, 11월 집단면역 목표를 더 빠르게 달성하기 위해 총력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정 청장의 ‘연말까지 거리 두기 불가피' 발언은 이와 결이 크게 다른 것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정 청장 발언을 긍정적으로 보는 분위기가 강하다. 마상혁 대한백신학회 부회장은 “질병청이 국민에게 현 방역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11월이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는 헛된 기대를 심어주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정 청장이 국민과 정확한 의사소통에 나선 것 아니냐”는 평도 있다.
◇”방역에 정치가 개입해선 안 돼”
정 청장의 존재감이 지금보다 더 부각돼야 한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방역 전문가로서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고 꿋꿋하게 방역 체계를 운영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올 1월 “백신 접종과 관련해선 질병청장이 전권(全權)을 가지고 전 부처를 지휘하라”고 했다. 그러나 정 청장이 그간 적극적으로 ‘백신 전권'을 행사하는 모습이 공개된 적은 거의 없다. 때로는 권위가 위축되는 모습까지 노출되면서 “정 청장이 백신 수장이 맞느냐”는 의문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무엇보다 문 대통령 스스로가 이 원칙을 깼다는 말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백신 전권' 발언 닷새 뒤인 올 1월 20일 SK바이오사이언스 공장을 찾아 “2000만명 분 백신을 추가 확보할 가능성이 열렸다”고 말했다. 기자 문의가 빗발치자 질병청은 뒤늦게 “노바백스에서 백신 기술을 도입하는 계약을 추진 중”이라고 발표했다. 이후에도 백신 추가 도입 소식은 정세균 국무총리 등 정부 인사들이 먼저 발표했다.
백신 전권을 쥔 수장이 뒷북을 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잠시 중단된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접종 재개 방침을 발표한 것도 정 청장이 아니라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다. 권 장관이 지난 8일 기자 간담회에서 “AZ 백신 접종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하자 질병청은 당일 몇 시간 뒤에 권 장관 발언을 뒷받침하는 보도 자료를 냈다. 정 청장은 11일에야 ‘AZ 백신 접종 재개'를 공식 발표했다. 다른 부처도 마찬가지다. 질병청은 지난 2일 “고3 학생들이 2분기 백신 접종 대상자에 포함된다”고 밝혔지만, 교육부는 이에 앞서 지난달 18일 “고3 학생에게 7월 여름방학에 백신을 맞추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미리 발표했다.
급기야 정부는 지난 2일 “코로나 백신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며 ‘범정부 백신 도입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하며 팀장에 권덕철 복지부 장관을 임명했다. ‘정 청장이 쥔 ‘백신 전권'의 실체가 뭐냐’는 비판이 본격적으로 불거져 나온 계기가 됐다. 김우주 고려대 교수는 “우리나라의 방역은 여기저기서 각자 알아서 싸우는 ‘각개전투’ 식으로 이뤄지는 느낌”이라며 “정 청장이 방역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간섭하면 안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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