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에게 합의 강요 말라"..법원, 2차 피해 잇따르자 경고

전현진 기자 2021. 4. 11.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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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측 재판 연기요청 이후 '협박당했다' 탄원서 속출 따라
재판부 "변호사 통해서만 진행..고통 줬다면 양형에 역효과"

[경향신문]

지난 7일 오후 준유사강간 혐의를 받는 손모씨의 항소심 첫 재판. 구속 상태인 그는 법정에 들어서자마자 손을 들고 외쳤다. “재판을 연기해주십시오. 합의를 아직 못했습니다. 아들이라도 보내겠습니다.” 서울고법 형사11-2부(재판장 황의동) 판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잠시 지었다. 손씨 측 국선변호인은 “이미 합의 절차를 진행했지만 잘 안 돼서 따로 진행해보겠다는 의미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재판장은 ‘합의는 재판 사항이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손씨의 요청을 받아들여 3주 뒤로 일정을 새로 잡았다. 경고도 남겼다.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데 필요 이상으로 접촉해 정신적 고통을 호소한다면 합의 노력은 역효과가 될 수 있습니다. 피해자 변호사를 통해서 합의하세요. 피해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지 피고인이 원한다고 합의를 종용하면 안 됩니다.”

법원 밖에서 벌어지는 합의 과정의 부작용을 우려한 재판부의 경고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같은 날 오전 상해 및 모욕 혐의로 재판을 받는 이모씨 측도 “지금 당장이라도 피해자에게 찾아가 사과하고 싶다. 합의를 위해 선고까지 넉넉히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2단독 송승훈 부장판사는 “합의 때문에 기일을 여유롭게 주는 것은 재판부가 합의를 종용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며 “합의가 원만히 이뤄져 피해가 일부 회복되면 좋지만, 피해자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송 부장판사는 3주 뒤 선고하기로 하고 이렇게 말했다. “변호인과 피고인에게 고지합니다. 합의를 종용하거나 강요하거나, 합의금 액수와 관련된 불미스러운 언행으로 2차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하세요.”

송 부장판사는 범죄 피해자들이 합의 과정에서 협박을 당했다거나 ‘2차 피해’를 겪는다는 탄원서가 법원에 접수되는 일이 늘었다고 말했다. 예컨대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으로 재판받는 피고인들이 피해자들에게 피해 금액의 10~20% 정도를 합의금으로 제시한 뒤 “이 돈이라도 받고 합의해야지 재판 끝나면 이것도 못 받는다”는 식으로 합의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성범죄의 경우 합의 요구 자체가 ‘2차 가해’로 여겨지기도 한다.

형사사건에서 합의는 피해자에게 합의금을 준 뒤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피해자의 합의서를 받아 법원에 제출하는 것을 가리킨다. 피해자에게 용서받고 피해 회복이 일부 이뤄졌다는 의미로 여겨져 피고인에게 유리한 자료로 쓰인다. 피해자 입장에서도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손해배상 등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일부 피해를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합의 과정이 모두 원만하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가 원치 않는 합의를 받아내기 위해 위협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서울 의 한 호프집 주인 김모씨에게 맥주병을 들고 위협(특수협박 등)한 이모씨(64)는 특수상해죄로 집행유예 기간 중이었다. 합의를 못하면 수감 생활을 피하기 어려웠다. “100만원에 합의해달라”는 요구를 김씨가 받아들이지 않자 이씨는 결국 그를 살해했고 징역 25년이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 한 판사는 “사건의 성격과 피해자들의 피해 감정은 저마다 다르다. 손해배상을 원하는 피해자도 있고 처벌을 원하는 이들도 있다. 합의 요구에 대한 반응도 다를 것”이라고 했다. 피해자 전담 국선변호인 신진희 변호사는 “합의 과정에서 또 다른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법적인 의미와 효력을 우선 피해자에게 잘 설명해야 하고, 피고인이 정말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것인지 구체적인 사정 등을 정확히 알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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