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 속 소나무를 지켜라".. 잿더미 딛고 선 '희망' 한 그루

왕태석 2021. 4. 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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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청 산림항공본부 최관식 주무관을 비롯한 공중진화 대원들이 산불 진압 후 하루가 지난 지난달 25일 사투 끝에 지켜낸 소나무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왼쪽부터 최민찬, 최관식, 이은학, 김수만 주무관. 산림청 산림항공본부 제공
지난달 31일 강원 홍천군 성산리 산불 현장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소나무가 폐허 속에서 홀로 푸르다. 홍천=왕태석 선임기자

산림청 산림항공본부 소속 공중진화대원 최관식 주무관은 지난달 23일 밤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 강원 홍천군 화촌면 성산리 일대를 휩쓴 거센 불길 속에 서 있던 한 그루 소나무의 위태로운 모습, 이 소나무를 지켜내기 위해 벌인 두 시간의 사투가 생생하기 때문이다. 최 주무관과 동료들은 맹렬하게 몰아치는 화염과 지독한 연기 속에서 소나무를 지켜냈고, 꿋꿋이 살아남은 소나무는 그 자체로 기적이 됐다.

수천, 수만 그루의 나무가 잿더미로 변하는 상황에서 최 대원을 비롯한 동료들은 왜 이 소나무를 목숨 걸고 지켜내야 했을까. 수령 160년에 높이 6m, 둘레 284㎝ 크기의 이 소나무는 홍천군 보호수라는 점 말고도 지역 주민들에겐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고사했다 9·28수복과 동시에 되살아나면서 '국운(國運)'과 함께해 온 상징적인 나무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23일 강원 홍천군 성산리 산불 현장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소나무가 새까만 폐허 속에서 홀로 푸르다. 홍천=왕태석 선임기자

마을 주민들은 버섯 모양을 하고 있고 위쪽이 평평한 이 소나무를 '방석 소나무'라고 부른다. 마을 어른들에게 방석 소나무는 어린 시절 대표적인 소풍 장소였고, 젊어서는 연인, 친구들과 함께 어렵게 구한 카메라를 들고 찾던 추억의 장소였다. 지금은 전국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숨겨진 출사 명소다. 지역 토박이 강은수 이장협의회장은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그 소나무는 수령이 사오백 년이 넘는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마을의 수호신과도 같은 방석 소나무가 위험에 처한 건 지난달 23일 오후 인근 농민이 쓰레기를 태우다 불이 야산으로 옮겨붙으면서다. 산불이 시작되자 산림청 헬기가 출동해 불길을 잡았지만, 해가 지면서 헬기 진압이 불가능해 지자 불길이 다시 살아났다. 당시 현장에서 투입된 최관식 주무관 등 9명의 공중진화대원들에게 “홍천 소나무가 소실 위기에 있다”는 긴급 무전이 도착했다. 대원들은 소나무를 지키기 위해 곧장 이동했고, 강한 바람을 타고 번지는 화마와의 사투가 시작됐다.

지난달 23일 화마에 포위된 소나무가 위태롭게 서 있다. 산림청 산림항공본부 제공
최관식 주무관이 지난달 23일 소나무 주변에서 물을 뿌리며 사투를 벌이고 있다. 산림청 산림항공본부 제공

최 주무관이 호수를 잡았고 다른 대원들은 불길이 소나무 쪽으로 옮겨붙지 않도록 방화선을 구축했다. 필사적인 노력 끝에 불길은 기적적으로 소나무를 피해 갔다. 산불이 완전히 진화되고 난 다음날 예찰 활동을 위해 현장을 다시 찾은 최 주무관과 동료들은 스쳐간 불길로 인해 치료를 받고 있는 소나무가 안쓰러우면서도, 고통을 견디는 의젓한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최 주무관은 “이렇게 아름답고 웅장한 소나무를 살릴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31일 강원 홍천군 성산리 일대 산림이 숯덩이로 변해 있다. 곳곳에 불에 탄 나무들이 나뒹굴고 있어 마치 폭격을 맞은 것 같았다. 홍천=왕태석 선임기자
7일 다시 찾은 산불 현장에서 불에 그을린 나무 한 그루가 애처롭게 서 있다. 홍천=왕태석 선임기자

산림당국에 따르면, 당시 산불이 순간 최대풍속 8m/s의 강한 바람을 타고 확산하면서 축구장 28개에 달하는 20만㎡ 넓이의 산림을 숯덩이로 만들었다. 화재 발생 일주일이 지난 지난달 31일 기자가 찾은 산불 현장은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숯덩이로 변한 나무와 앙상한 나뭇가지가 불에 그을려 잿더미로 변한 가운데 소나무 한 그루만이 푸르름을 간직한 채 우뚝 서 있었다. 새까만 언덕에 ‘한 점’의 녹색 나무는 마치 화성에서 발견한 생명체처럼 반가웠다.

소나무는 화염을 이기고 살아남았지만 수피와 일부 가지에 화상을 입었다. 홍천=왕태석 선임기자

그러나 소나무에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화마가 남긴 상처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대원들의 사투 덕분에 살아남았지만 수피(껍질)와 일부 가지에 화상은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홍천군은 구사일생으로 지켜낸 보호수에 영양제를 투여하고, 산불 현장에서 주로 발생하는 소나무좀과 리지나뿌리섞은병 등 병충해를 예방하기 위한 약제를 나무 표면에 도포했다. 남궁현우 홍천군청 산림과 주무관은 "이번 주엔 천공성 회충에 대비해 화상을 입은 상처 부위에 황토도포 처리와 가지치기를 할 예정"이라며 “소나무의 빠른 회복을 위해 군 차원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강력한 화염에 녹아내린 빈병들이 곳곳에서 나뒹군다. 홍천=왕태석 선임기자
7일 오전 산불 현장에 나무를 심기 위해 인부들이 묘목을 어깨에 지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있다. 홍천=왕태석 선임기자

소나무 주변은 진화 당시 나무를 덮은 흙더미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소방대원들이 연신 물을 뿌리고 있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숲에선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녹아내린 빈 병들이 뒹굴어 당시 화염이 얼마나 맹렬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난 7일 다시 찾은 소나무의 상태는 한결 나아 보였다. 불에 그을린 가지는 여전했지만 수피에선 치유의 흔적이 곳곳에 나타났다. 이날 이른 새벽부터 많은 인력이 투입돼 산 전체를 복구하기 위한 식목 작업이 이루어졌다. 완전 회복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엿볼 수 있었다.

7일 산불 현장에 심어진 묘목. 홍천=왕태석 선임기자
7일 잿더미로 변한 산불 현장에서 새싹이 올라오고 있다. 홍천=왕태석 선임기자

올해는 가뭄이 심해 예년보다 산불이 잦다. 산림청에 의하면 산불 발생 건 수가 1월 40건, 2월 103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0%가량 늘었다. 산림 당국은 산불 예방을 위해 2월부터 5월 15일까지 산불방지 기간으로 정해 출입이 허가되지 않은 등산로나 샛길을 통해서 입산을 할 경우 과태료를 부과하고 있다. 사소한 부주의라도 그로 인해 산불이 발생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게 된다.

지난달 31일 산불 진압 후 일주일이 지난 뒤 찾은 강원 홍천군 성산리 일대. 홍천= 태석 선임기자

왕태석 선임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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