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도록 드러낼 수 없었던 사랑, '자신'도 감춰버렸다
(6) 성소수자 화가의 두 가지 삶
이탈리아 거장 미켈란젤로
57살에 만난 청년과 '평생 연인'
그림·시로 사랑의 열정 속삭였지만
종교적 세계관과 성적 정체성 충돌
죽을 때까지 괴로워한 '비밀'로
덴마크 화가 릴리 엘베
아내의 그림 모델 대역해주다
우연히 깨달은 '내 안의 여성'
비난하는 세상과 위험 무릅쓰고
세계 최초 성전환 수술 받은 뒤
"나는 완전히 나 자신이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에게는 과외선생이 있었다. 국립극장 발성 코치였던 과외선생은 대처의 목소리를 남성과 여성 중간 지점인 46헤르츠로 낮추도록 혹독하게 지도했다. 그리하여 대처는 ‘남자처럼’ 연설할 수 있었다.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늘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공식 장소에서 그는 자신의 휠체어를 다른 이의 눈에 안 띄게 치웠다. 대처와 루스벨트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켄지 요시노 뉴욕대 교수는 이들의 행동을 ‘커버링’(Covering)이라고 명명했다. 요시노 교수는 저서 <커버링>에서 “커버링은 주류에 부합하기 위해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정체성의 표현을 자제하는 것”이라며 “사회가 소수자성을 ‘티 내지 말라’고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주류의 눈치를 살폈던 대처는 자신의 여성 음색을, 루스벨트는 자신의 장애를 숨긴 셈이다. 그렇다면 대중의 시선에 민감한 정치인들만 커버링을 택했던 걸까.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조각가이자 천재 화가 미켈란젤로(1475~1564)도 일평생 자신의 본모습을 커버링했다. 왜냐하면 그는 성소수자였기 때문이다.
“죄를 지으며, 나 자신을 죽이며 살아간다”
1564년 2월18일 이탈리아 로마. 88살의 미켈란젤로는 이제 막 숨을 거두려는 차다. 죽음의 순간, 사랑과 존경과 슬픔이 뒤섞인 표정으로 미켈란젤로의 손을 잡고 있던 사람은 중년 남성 톰마소 데이 카발리에리(1509~1587)였다. 미켈란젤로가 죽기 전 제일 오랫동안 눈을 맞춘 사람 역시 그였다. 당연했다. 톰마소는 미켈란젤로의 예술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었으며, 무엇보다 ‘불멸의 연인’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해는 1532년. 쉰일곱 미켈란젤로의 눈앞에 신기루처럼 등장한 23살의 귀족 청년 톰마소는 아름다움의 현신이었다. 톰마소는 탄탄한 육체와 세련된 매너를 지닌, 예술을 사랑하는 젊은이였기 때문이다. 그 만남 이후 미켈란젤로는 톰마소에게 남은 인생 모두를 걸 정도로 몰두했다. 34살의 나이 차이도 상관없었다. 톰마소에게 수많은 연애편지를 쓰고 헌시도 지었다. 숭배에 가까운 찬사를 담은 편지 내용을 보면 평소 칭찬에 인색했던 미켈란젤로가 쓴 것이 맞는지 의아할 정도다. “그대의 이름을 잊는 것은 매일 먹는 음식을 잊는 것과 다름없소. 하지만 나는 몸과 마음에 영양분을 주는 그대의 이름을 잊느니 차라리 불행히도 몸에만 영양분을 주는 음식을 잊겠소. 그대가 내 마음에 떠오를 때면 여러 가지 즐거움이 생겨나고 죽음의 슬픔과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오.”(1553년의 편지)
미켈란젤로는 톰마소에게 여러 드로잉 작품을 선물했는데, 그중 독수리가 미소년을 유괴하는 그리스 신화를 담은 <가니메데스의 납치>는 더없이 관능적이다. 트로이 왕자 가니메데스는 어느 날 양 떼를 돌보다가 호색적인 제우스의 눈에 띄었고, 그의 미모에 반한 제우스는 독수리로 변신해 가니메데스를 납치한다. 그림 속 독수리는 양발로 가니메데스의 다리를 움켜쥐고 가니메데스의 알몸을 목으로 휘감고 있다. 하지만 톰마소의 실제 모습과 닮았다는 가니메데스의 얼굴은 두려움과 당혹감 없이 평온하다. 미켈란젤로는 톰마소를 가니메데스로 빗대고 자신을 제우스로 은유해 걷잡을 수 없는 열정을 그림으로 고백한 셈이다.
미켈란젤로의 ‘소년에 대한 열정’은 어느덧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며 뒷말을 낳았다. 이러한 정황은 미켈란젤로가 바초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아들을 미켈란젤로의 도제로 들여보내길 원했는데, 뜬금없이 아들의 아름다운 용모를 자랑하면서 미켈란젤로가 원한다면 침대까지 따라가게 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그런 쾌락은 당신이나 즐기라”고 쏘아붙였다고 하니, 그의 동성애는 당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것 같다.
미켈란젤로의 고민은 꽤 깊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청년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이 시대와 불화했기 때문이다. 당시 동성에게 애정을 표현한다고 해서 법적으로 처벌받지는 않았지만, 동성 간 성행위는 명백하게 범죄로 취급되었고 피렌체에서는 사형을 받을 수도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려고 노력한, 길고도 절망적인 싸움이 그가 쓴 시에 잘 묘사되어 있다. “만약 내 눈을 멀게 하는 이 지극한 아름다움이 곁에 있을 때 내 심장이 견디지 못한다면, 또 그 아름다움이 멀리 있을 때 내가 자신감과 평정을 잃는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떤 안내자와 호위자가 있어 나를 지탱해줄 것이며, 다가오면 나를 태워버리고 떠나면 죽게 만드는 당신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것인가?”
미켈란젤로가 괴로워했던 이유는 세상의 박해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음속에서도 극도의 혼란이 일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톰마소’와 ‘영혼을 구원할 그리스도교 신앙’, 이 두 세계가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사랑을 부정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사랑이 죄스러운 것은 아닌지 의심했으며, 그 고통을 다음과 같이 시에서 토로했다. “나는 죄를 지으며, 나 자신을 죽이며 살아간다. 내 삶은 더이상 나의 것이 아니라 죄의 것이다. 내 선함은 하늘이 내게 주신 것이지만, 나의 악함은 나 자신에 의한 것, 내가 빼앗긴 자유의지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마지막을 지키러 온 톰마소에게 사랑의 말을 남기는 대신 “내가 죽으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기시켜 달라”는 지극히 종교적인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켈란젤로와 톰마소의 사랑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이후 그의 사랑을 담은 글이 발굴되고 조명되었기 때문이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미켈란젤로의 유일한 혈육인 조카 레오나르도는 그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데, 미켈란젤로 사후 60년이 흐른 1623년 그 조카의 아들이 유품 중에서 미켈란젤로의 육필 시를 발견한다. 그는 이 시들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지만, 곧 그 연시가 남성에게 바쳐진 걸 알고 경악한다. 공개하면 가문의 수치가 될 것 같았지만, 그냥 묻어버리기에는 아름답고 애절한 문장이 너무나 아까웠다. 결국 조카의 아들은 고심 끝에 타협안을 선택했다. 시 속 남성형 대명사를 여성형으로 바꿔 출간하는 것!
그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미켈란젤로의 시집은 시인으로서 그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에는 기여했지만 미켈란젤로가 성소수자였다는 진실은 향후 250여년이나 가려버렸다. 이 시집은 19세기 말에서야 비로소 온전한 모습으로 출간된다. 영국의 미술사학자이자 성소수자 인권운동가인 존 애딩턴 시먼즈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생애>라는 책을 펴내면서 시를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여성형 대명사가 남성형 대명사로 복원되면서, 톰마소는 마침내 25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미켈란젤로의 인생 속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본래의 여성’으로 살려는 죽음
이렇듯 미켈란젤로는 커버링이라는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명성과 안락을 모두 포기하고 자신을 드러낸 예술가도 있었다.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을 거부하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좇아 살았던 덴마크의 화가 릴리 엘베(1882~1931)가 그 주인공이다.
카드놀이를 하는 중이었을까. 자줏빛 짧은 원피스를 입은 사람이 ‘하트의 여왕’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하트의 여왕은 ‘미인’을 뜻하는 카드. 담배를 문 채, 무심하게 시선을 던지는 그는 진정 하트의 여왕 같다. 날렵한 눈썹, 탐스러운 붉은 입술, 당당한 표정과 대담한 자세까지, 덴마크의 화가 게르다 베게너(1886~1940)는 릴리 엘베라는 이름의 이 사람을 정성을 담아 그려냈다. 당연했다. 릴리는 게르다가 사랑하는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남편! 릴리는 당시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였다. 도대체 게르다와 릴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릴리의 존재는 1908년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풍경화가 에이나르 베게너의 몸속에 얌전히 살고 있었다. 남자였던 에이나르는 1903년 덴마크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만난 동료 화가 게르다와 사랑에 빠져 1년 뒤 여느 평범한 남녀처럼 결혼했다. 하지만 릴리가 잠에서 깨어나면서 이 부부의 삶은 격변을 맞이했다. 1908년, 인물화를 그리던 게르다가 예고 없이 약속을 깨뜨린 모델 대신 포즈를 취해 달라고 에이나르에게 부탁한 게 계기였다. 에이나르는 아내의 요청에 스타킹과 굽 높은 구두를 신었는데, 그 순간 릴리의 존재를 각성하게 되었다. 줄곧 남자로 살아왔던 시간이 실제로는 ‘남장’이었다는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 후부터 에이나르는 릴리가 되었다. 게르다도 본래의 성 정체성을 찾고 싶다는 남편의 뜻을 존중했다. 이때부터 릴리는 게르다의 그림에 자주 등장했다. 화장하고 여성복을 입은, 캔버스 속의 릴리는 편안해 보인다. 하지만 캔버스 밖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사회는 부부를 향해 노골적으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신에게 도전했다며 소송을 걸겠다는 사람도 나타났고, 집에 오물을 투척하며 비난하는 이도 있었다. 지친 두 사람은 1912년 고향을 떠나 좀 더 개방적인 분위기의 프랑스 파리로 터전을 옮겼지만, 릴리에겐 파리 또한 힘겨운 곳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의 의사들도 릴리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식으로만 진단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릴리는 주눅들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살라’는 시대의 폭력에 맞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하트의 여왕> 속 릴리는 ‘나의 본모습으로 사는 것이 바로 정상성’이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하다.
결국 1930년 48살의 릴리는 좀 더 릴리답게 살기 위해 수술대 위로 올라갔다. 세계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것이다. ‘최초’인 만큼 수술에 생명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릴리의 결심은 확고했다. 아이를 갖기 위해 난소와 자궁까지 기증받아 이듬해까지 모두 5번의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몸은 타인의 자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수술 3개월 뒤인 1931년 9월13일, 릴리는 감염과 그로 인한 심장 마비로 사망한다. 그러나 그녀는 짧은 순간이나마 자신이 원했던 여성의 모습으로 살 수 있었다. 법적으로도 성별을 변경했다. 스스로 투쟁해 성취한 값진 열매였다. 이는 첫 수술 후 릴리가 했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나는 완전히 나 자신이다.”
한국의 성소수자들은 미켈란젤로의 커버링과 릴리의 당당함 중 어느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까?얼마 전 ‘퀴어퍼레이드’에 대한 질문을 받은 유력 정치인의 거침없는 답변은 그 실마리를 제공한다. “차별에 대해서 반대한다. 하지만 자신의 인권뿐만 아니라 타인의 인권도 소중하다. 표현할 권리가 있는 만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이는 ‘성소수자를 혐오할 권리’를 인정하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노골적인 말이 공적인 장에서 여과없이 나올 수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여전히 성소수자들은 다수와 다르지 않다는 보호색을 갖춰야 비로소 사회의 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차별금지법을 15년째 상정도 못 하는 상태가 이 시대의 후진성을 증언한다. ‘정상성’이라는 커버 따위 필요없는 세상은 도대체 언제쯤 도래할 것인가.
▶ 이유리 작가.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등 예술 분야의 책을 썼고,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한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을 묶어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냈다. 이번엔 그림을 매개로 인간 사회에 작동하는 다양한 층위의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3주에 한번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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