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을 노린다, 미끼는 사랑.. 수상한 '랜선 애인'

조철오 기자 2021. 4. 1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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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남성 A씨는 작년 인스타그램을 통해 한 여성을 알게 됐다. 자신을 미국 군인이라 소개한 이 여성은 “8살 때 부모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며 “고아가 됐지만, 스스로 강해지려고 군인이 됐다”고 소개했다. 이름은 ‘kim castro’, 한국 이름은 ‘nam hee’라고 했다. A씨는 ‘kim’이 동료들과 찍은 사진, 군복을 입고 훈련하는 사진 등을 하나씩 살펴보며 호감을 갖게 됐다. 늘씬한 몸매와 예쁜 얼굴이 A씨 마음을 사로잡았다.

로맨스스캠을 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한 페이스북 계정. 일부 네티즌들은 'kim castro'란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얼굴을 도용해 사기를 시도한 사례가 있었다고 밝혔다. /페이스북 캡처

A씨는 어느 날 ‘kim’으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았다. 시리아 탈레반 조직과 분쟁 중 다마스쿠스란 도시에서 우연히 500만 달러를 얻게 됐다며, 한국에 밀반입하는데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돈이 든 상자를 배송하는 비용이라며 수수료 300만원을 내달라고 요구했다. “내 사랑, 제발 꼭 도와줘”라는 말도 했다. 마음이 흔들린 A씨는 돈을 입금했다. 얼마 후 ‘kim’은 소식을 뚝 끊었다. A씨는 “대화할 때는 좋은 친구라 생각했는데 지나고 나니 사기꾼이었다”며 “평소 여자친구가 없어 외로웠는데, 내가 너무 순진했다”고 말했다.

◇국내로 활동 영역 넓힌 ‘로맨스 스캠’

얼마 전부터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서 외국인을 가장해 친구로 사귀자며 접근해 사기를 치는 ‘로맨스 스캠’(romance scam)이 발생하고 있다. ‘사랑 사기’ 정도로 해석되는 로맨스 스캠은 미국이나 영국 등 외국에서 국내보다 앞서 발생했는데, 4년 전부터는 이들 단체가 국내로 활동 영역을 넓힌 것이다.

앞서 소개한 A씨 사례는 경찰에 접수된 사건들과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올라온 피해 사례 등을 정리한 것이다. A씨의 피해 금액은 약 300만원이었지만, 많게는 1억원 정도의 거금을 ‘kim’에게 보낸 경우도 있었다. 온라인 계정의 ‘kim castro’는 사기꾼이지만,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다. 한 방송사가 실제 ‘kim castro’를 만났고, 그는 “나의 개인 정보와 사진이 범죄 집단에 도용된 것으로 보인다”며 피해를 호소했다. 현재 포털 사이트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사건과 관련된 많은 후기를 볼 수 있다.

'amanda'란 이름의 한 여성이 온라인을 통해 다른 남성과 친해지고자 메세지를 주고 받은 내용. 이 캡처본을 올린 한 커뮤니티에 올린 사람은 "지인의 피해 사실을 알리고자 작성했다"고 밝혔다. /온라인 커뮤니티
'amanda'란 이름의 한 여성이 온라인을 통해 다른 남성과 친해지고자 메세지를 주고 받은 내용. 이 캡처본을 올린 한 커뮤니티에 올린 사람은 "지인의 피해 사실을 알리고자 작성했다"고 밝혔다. /온라인 커뮤니티

연방 공정거래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로맨스 스캠 피해 건수는 2015년 8500건에서 2018년 2만1400건으로 증가 추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서는 첫 피해 사례가 2017년 7월에 발생했다. 국내에선 로맨스 스캠을 ‘기타 범죄’로 분류해 정확한 범죄 발생 통계가 확인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경찰은 피해 사례가 매년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1일 서울 송파경찰서는 로맨스 스캠 피의자인 나이지리아 남성을 붙잡기도 했다.

◇“미화 반입 자금” “총탄 부상 치료비” 등 갖가지 명목으로 돈 요구

로맨스 스캠 사기범은 자신의 신분을 그때그때 지어냈다. 미모의 여성이거나, 잘생긴 남성, 유대인, 동양인, 금발머리 서양인 등 상황에 따라 출신과 신분을 달리했다. 2019년 9월에는 “미화 반입 자금이 필요하다. 일단 돈을 빌려달라”며 접근한 로맨스 스캠 사기범에게 6370만원을 뜯긴 피해자가 있었다. 대전의 한 경찰도 비슷한 수법으로 최근 1억원가량 피해를 봤다. ‘kim’에게 지난해 11월 586만원을 뜯길 뻔한 남성도 있었다. 당시 서울 강동경찰서는 피해 남성의 신고를 받고 금융기관이 범행에 이용한 계좌에 대해 지급정지 조치를 내려 돈을 되찾기도 했다.

최근에는 자신이 내전 중에 있는 시리아에 있다는 사례가 많았다. 실제로 만나는데 어려움이 있는 나라를 대상지로 고른 것으로 판단된다. “총탄 부상 때문에 치료비가 필요하다” “한국에 가고 싶은데 돈이 부족하다” 등 다양한 이유를 댔다. 가짜 미군이나 외교관 SNS 계정으로 접근하기도 했다. “은퇴 후 한국에서 당신과 살고 싶다” “파병 근무로 인한 포상 재산을 보내겠다”며 항공료나 통관비, 보관비 등 명목으로 자연스럽게 돈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진짜 사랑인 줄 알았다” “홀렸던 것 같다” 증언 상당수

경찰은 외로움이 많은 사람이 주로 피해를 당한다고 분석했다. 경찰학연구소가 2019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상당수 피해자는 연인과 이별, 사별, 이혼 등 감정적으로 시련을 겪고 있을 때 로맨스 스캠에 휘말렸다. 나이별로는 40~60대가 많았다. 전문가들은 피해 이유에 대해 “늦은 나이까지 결혼하지 못해 외로운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만난 이성에게 직접 만나지도 않고 사랑을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실제 피해자들이 블로그 등에 게재한 후기를 살펴보면 “당시에는 진짜 사랑인줄 알았다” “내가 무언가에 홀렸던 것 같다”는 증언이 상당수였다.

로맨스 스캠의 범죄 특징은 나이지리아, 라이베리아 등 영미권 아프리카 국가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지난달 24일 경기도 동두천경찰서는 “부정 계좌가 사용됐다”는 신고를 접수했다. 2분 만에 현장에서 범인을 검거했는데, 이 남성의 국적은 라이베리아였다. 경찰 관계자는 “한국에 취업하기 위해 비자를 발급받은 아프리카인들이 주로 범죄에 가담한다”며 “특히 나이지리아 한 범죄 단체가 조직적으로 접근해 여기저기 사람들을 속이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콩에서 ‘로맨스 스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최근에는 한 여성이 4년 동안 200여차례에 걸쳐 1억8000만홍콩달러(약 260억원)를 보냈다.

신상철 경찰대 교수의 논문 ‘나이지리아 범죄 조직 국내 활동 실태 및 대응방안’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이지리아는 과거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 국민들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고, 서구 교육 체계가 도입돼 있어 국민들이 인터넷 등 모바일 사용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치안 상태가 매우 열악해 정부가 범죄 조직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특징도 있다.

경찰은 로맨스 스캠을 벌이는 서아프리카 범죄 단체가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전했다. 본사는 서아프리카에 있고, 조직원을 한국에 파견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 사태로 비대면 만남이 활성화하자 데이트 앱 등을 통해 피해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경찰 관계자는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친구가 돈을 요구할 경우 무조건 사기라고 보고 경계해야 한다”며 “당했다 싶으면 숨기지 말고 바로 경찰에 신고해 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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