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영화, 정부 심의 뚫고 사회문제도 스크린에 담다

한겨레 2021. 4. 10.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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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랜선 동남아][토요판] 랜선 동남아
⑫ 베트남 영화
통일 후 계몽과 홍보 위주였다가
1986년 도이머이 개혁조처 따라
표현자유 확대되자 소재 다양화
코미디·액션 외 빈부차·동성애 등
사회갈등 다룬 영화도 속속 나와
북부보단 남부 영화인들이 주도
베트남 출신 해외파도 맹활약중
통일 이후 사회 계몽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던 베트남의 영화는 최근 소재가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사진은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커런츠상을 받았던 쩐타인후이(Tran Thanh Huy) 감독의 <롬>(Rom)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도시빈민 문제를 다뤘다. 부산국제영화제 누리집 갈무리

베트남 영화, 그러면 우리는 <디어 헌터>, <람보>,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하늘과 땅> 등 할리우드 전쟁 영화를 떠올린다. 할리우드는 <라스트 풀 메저>처럼 최근까지도 베트남전쟁 영화를 수없이 만들어냈다. 할리우드 전쟁 영화에서 벗어나면 <인도차이나>, <콰이어트 아메리칸>, <쓰리 시즌>이나, 쩐아인훙 감독의 <그린 파파야 향기>, <시클로>, <여름의 수직선에서> 등을 떠올리기도 한다.

예전에 나온 <하얀 전쟁>, <알포인트>, <님은 먼 곳에> 등 한국 영화도 베트남전쟁에 집중했다. 최근에는 씨제이(CJ)엔터테인먼트가 베트남 쪽과 합작해 만든 <수상한 그녀>의 베트남판 <내가 니 할매다>, <써니>의 베트남판 <고고 시스터즈>, 이 밖에 <마이가 결정할게 2>, <불량소녀>(저는 아직 열여덟이 안 됐어요), <걸 프롬 예스터데이> 등 한국 기업이 투자한 영화들이 베트남에서 인기를 끌었다. <불량소녀>는 2017년 제20회 베트남 필름 페스티벌에서 최고상인 금(金)연꽃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에서 극장을 여럿 운영하면서 베트남 영화산업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어, “도약하는 베트남 영화, 주도하는 한국 기업”이라는 평이 있기도 하다. 이런 평은 듣기 좋을지 모르나 자못 과장된 듯하다. 한국인들이 베트남에 많이 다녀왔고 시야도 넓혔으니, 미국 중심, 한국 중심에서 벗어나 베트남 영화 자체로 눈을 돌려보는 것은 어떨까? 최근에는 ‘베트남 영화 리뷰’를 지속해서 올리는 한국인 유튜버도 생겼다. 상호 이해의 심화는 두 나라 사람들 사이에 탄탄한 신뢰의 다리를 놓을 것이다.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당녓민 감독

개혁 이전 베트남에서 영화는 국가 정책을 국민들에게 홍보하는 데 주안점을 둔 매체였다. 국민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문화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구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개혁 이전 우수작으로 언급된 영화들은 독립운동과 전쟁을 주로 다뤄 애국심을 높이려 했다. 이런 경향은 베트남이 1945년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자마자 30년간이나 전쟁을 치러야 했으니 나름대로 타당한 일이기도 했다. 가령 1970년 북베트남의 첫 필름 페스티벌에서 금연꽃상은 <응우옌반쪼이>, <젊은 전사> 등에 주어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응우옌반쪼이는 1964년 남베트남 사이공을 방문한 로버트 맥나마라 미국 국방장관을 꽁리 다리에서 암살하려 했다가 붙잡혀 스물넷에 생을 마친 베트콩 전사다. 1973년 제2회 베트남 필름 페스티벌에서 금연꽃상을 받은 <어머니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나 은연꽃상을 받은 <17도선 낮과 밤>도 베트남전쟁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뤘다. 베트남은 1946년 말부터 1954년 5월까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른 끝에 제네바협정을 맺어 17도선을 경계로 분단됐었다.

호찌민(사이공)에 있는 한 롯데씨네마 영화관의 모습. 이한우 제공
하노이시 이온몰에 입점한 한국계 영화관 씨지브이(CGV). 이한우 제공

1975년 통일된 뒤 베트남 정부는 경제난을 극복하려고 1986년 말 ‘도이머이’(쇄신이라는 뜻)를 선포하며 개혁정책을 편다. 이로써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고 영화의 소재도 다양해졌다. 새 흐름은 국내 감독들과 함께 해외로부터 귀국한 베트남 출신 감독들이 만들어갔다. 국내파 가운데는 당녓민(Dang Nhat Minh) 감독이 국내외에 잘 알려진 편이다. 중부의 후에 출신으로 러시아 영화를 번역하다가 영화를 공부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1984년에 만든 <10월이 오면>에서 전쟁에 남편, 아들을 내보낸 가족의 애환을 담았다. 남편을 전쟁터로 보낸 부인이 마을 선생에게 남편 대신 편지를 써 연로한 시아버지에게 보내주도록 부탁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부정한 관계로 오인해 선생은 떠난다. 사람들이 오해임을 깨닫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10월에 그 선생이 다시 오지 않으려나 한다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배양수 교수(부산외대)에 따르면, 이 영화 속에 죽은 남편과 부인이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심사자들이 이를 미신으로 이해해 열세번의 검열 끝에 상영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87년에 만든 <강 위의 여자>는 후에를 가로지르는 흐엉장(香江)을 배경으로 해, 통일 전 남베트남에 속했던 후에 지역에서 활동하던 북베트남 전사와 남베트남 여인 간의 사랑과 배신을 그렸다. 감독은 여성을 휴머니즘으로 조명하려 했으나, 배 위에서의 정사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 장면을 보여줘 논란을 일으켰다. 당녓민은 1996년에 또 다른 역작 <고향 들판을 그리워하며>(향수)에서 북부 농촌의 한 소년이 성장하며 겪는 사랑과 갈등을 담았다. 그는 이 밖에도 <귀환>, <구아바> 등 여러 작품을 냈다. 베트남전쟁 일기를 영화화한 <태우지 마라>(전장 속의 일기)에서는 전쟁에 대한 베트남 북부의 시각을 보여줬다. 이는 당투이쩜의 일기인 <지난밤 나는 평화를 꿈꾸었네>를 각색한 것이다. 하노이 의사 집안의 딸인 당투이쩜은 군의관으로서 중부지방 꽝찌로 파견된다. 그는 야전병원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면서 마음으로 보듬다가 결국 적군의 폭격에 의해 전사하고 만다. “태우지 마시오, 그 안에 이미 불이 들어 있소”라는 베트남인 통역병의 요청에 따라, 그의 일기를 입수한 미군은 이를 미국으로 가져간다. 2005년 이 일기는 공개됐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 미국인이 텍사스텍 대학에 있던 일기 사본을 가족들에게 전한다. 이렇게 미국은 베트남과 화해를 모색한다.

베트남전 당시 폭격을 맞아 전사했던 북베트남 군의관의 전장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태우지 마라>의 포스터. 이한우 교수 제공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 수상작 ‘롬’

개혁 이래 베트남 영화에 코미디나 액션이 많았으나, 근래 감독들은 여러가지 사회 이슈를 다루기 시작했다. 도덕적 타락, 불륜, 동성애, 물질 만능, 빈부격차 등 소재도 다양하다. 일찍이 베트남 난민 출신 미국인 감독 토니 부이(Tony Bui)가 <쓰리 시즌>에서 개혁이 가져온 사회 변화와 이에 대응하는 여러 인물들을 묘사했다. 베트남 내에서는 호찌민시에 활동 기반을 둔 감독들이 현대 사회의 문제를 다루는 데 더 적극적이다. 대체로 북부 출신 감독들은 주제 선정과 촬영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더 절제돼 있다고 평가된다. 반면 호찌민시 영화계는 하노이보다 더 상업적이며 개방적이다.

일부 북부 출신 감독들도 이런 사회문제를 다뤘는데, 하노이 출신 레호앙(Le Hoang)은 <댄싱 걸>(Bar Girls)에서 개혁 이래 상업화된 사회의 타락과 물질주의를 고발했으며, <거리의 신데렐라>라는 속편도 제작했다. 부응옥당(Vu Ngoc Dang)은 북부 타인호아 출신으로 호찌민시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활동하기에 상대적으로 더 다원화된 시각을 보여준다. 그는 한국의 <풀하우스>의 베트남판을 감독하기도 했고, <다리 긴 아가씨>(미인), <센티미터마다 예쁨> 등 코믹한 영화를 내기도 했지만, <반란하는 핫 보이>(Lost in Paradise)에서 남성 동성애를 다뤘다. 케이시 우옌(Kathy Uyen)은 최근 레즈비언에 관한 영화인 <언니 동생>을 만들었다. 그는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산호세)에서 난 베트남계 미국인 배우 겸 감독이다. 새너제이는 베트남 통일 후 탈출한 남부 출신 베트남인들이 베트남 타운을 형성한 곳이다.

개혁 과정에서 불거진 빈부격차도 영화의 주요 소재다. 하노이 출신 응우옌판꽝빈(Nguyen Phan Quang Binh) 감독은 응우옌응옥뜨의 소설을 저본으로 하여 <끝없는 벌판>(The Floating Lives)을 만들어 남부 메콩델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들춰냈다. 도시 빈곤 문제는 최근 호찌민시 출신 쩐타인후이(Tran Thanh Huy) 감독이 데뷔작인 <롬>(Rom)에서 도시 빈민가에 사는 복권팔이 소년 롬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8년간 촬영해 완성한 이 영화는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커런츠상을 수상했다.

이와 함께 베트남에도 불기 시작한 복고풍 분위기가 영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수년 전부터 ‘꽁 까페’(Cong Caphe)가 개혁 이전의 사회주의 보급시대 분위기로 꾸며 인기를 끌자 여러 곳에 매장 수를 늘렸다. 통일 이전 남부 사회를 배경으로 한 문화상품들도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이런 조류 속에서 쩐브우록(Tran Buu Loc)과 케이 응우옌(Kay Nguyen) 감독이 만든 복고풍 영화인 <꼬바 사이공>(The Tailor, 디자이너)이 큰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 사이공에서 유명한 아오자이 전문점 타인느(Thanh Nu)를 9대째 운영하는 타인마이는 두 딸을 뒀는데, 타인마이가 숨진 뒤 서양 의상을 좇던 딸은 어머니가 자기 이름을 새긴 아오자이를 남긴 것을 보고 아오자이의 세계로 돌아온다는 줄거리다.

최근 베트남 영화계에서는 베트남 출신 해외파 감독들이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교포, 즉 비엣끼에우(Viet Kieu, 越僑)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쩐아인훙(Tran Anh Hung) 감독은 오래전부터 유명세를 탔다. 최근에는 통일 전 사이공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했던 쭉 찰리 응우옌(Truc Charlie Nguyen)과 조니 찌 응우옌(Johnny Tri Nguyen) 형제, 더스틴 찌 응우옌(Dustin Tri Nguyen)이 주로 무술영화에 출연하거나 감독으로서 활약하고 있다. <영웅 혈통>(더 레블), <전설은 살아 있다>, <르어펏>(Once Upon a Time in Vietnam, 일대 고수) 등이 그것들이다.

베트남 출신의 해외파 감독들도 베트남 영화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미국에서 성장한 쭉 찰리 응우옌 감독이 만든 <영웅 혈통>(더 레블)의 포스터. 이한우 제공

노르웨이서 자란 응오타인번

빅터 부(Victor Vu)는 남캘리포니아 베트남인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그는 초기에 <퍼스트 모닝>으로 미국의 베트남 이민사회를 그렸는데, 이후 무술 영화 <영웅 천명>(Blood Letter), 코믹 영화 <신부 대전>, 스릴러 <스캔들> 등으로 호평을 받았다. 최근에는 서정성 있는 작품을 내고 있는데, <나는 초원의 노란 꽃을 본다>는 베트남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시골 풍경으로 관객들의 눈길을 이끈다. 빅터 부는 이 영화로 2015년 제19회 베트남 필름 페스티벌에서 금연꽃상을 수상했다. 이어 그는 <푸른 눈>(Dreamy Eyes)에서 한 남성의 순수한 사랑을 그려 제법 인기를 얻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 국제장편부문에 출품됐으나 최종 후보에 들지는 못했다.

해외파 중에서는 응오타인번(Ngo Thanh Van, Veronica Ngo)이 가장 많은 활약을 보이고 있는 듯하다. 그는 베트남 남부 짜빈에서 태어나, 열살 때 가족들에 의해 배에 태워져 노르웨이에 보내졌다. 10년 후 그는 베트남으로 복귀해 미인대회에 참석한 뒤 모델, 가수, 배우, 감독 등으로 경력을 이어갔다. 그의 지명도를 높인 영화는 쭉 찰리 응우옌 감독의 <영웅 혈통>(더 레블)이었다. 이어 <용의 덫>(클래시), <르어펏> 등 여러 무술영화에 출연했고, 최근에는 <꼬바 사이공>, 레반끼엣(Le Van Kiet) 감독의 <하이 프엉>(Furie)에 출연했다. <하이 프엉>은 폭력배 출신 엄마가 폭력조직에 딸을 납치당한 뒤 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강인한 모습을 그린 영화다. 베트남판 <테이큰>이라 할 만하다. <하이 프엉>은 베트남과 미국에서 동시 개봉됐고, 2021년 아카데미상 국제장편부문에 올렸으나 선정되지는 못했다.

이렇게 베트남에서 개혁은 영화계에도 새로운 흐름을 가져왔다. 감독들은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앵글로 현대 사회를 비춘다. 정부의 심의로 인해 자유로운 작업에 제약을 받기도 하지만, 국내파 감독들, 베트남 출신 해외파 감독들이 이 바람을 일으키고 끌어가고 있다.

이한우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는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아시아 지역연구의 새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위해 40년간 지역연구에 매진해왔다. 동남아시아의 경제·사회·문화적 중요성이 커진 신남방 시대, 연구소는 그동안 연구 성과에 바탕을 두어 멀지만 가까운 이웃 동남아의 다양한 면모를 전한다. 랜선 여행을 하듯이 흥미롭게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를 소개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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