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백하다" 스스로 목숨 끊어 저항하는 사람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2021. 4. 10.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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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역사학자, 교육자 잰보짠(翦伯贊, 1898-1968)은 1968년 12월 18일 부인 다이수위안과 함께 수면제를 복용하고 동반 자살했다./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52회>

“진정 심각한 철학적 질문은 단 하나, 그것은 자살이다.” 1940년대 초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가 1942년 발표한 <<시지프스의 신화>>의 첫 문장이다. 당시 그는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의 지하에서 반(反)나치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카뮈의 관찰에 따르면, 현실의 ‘부조리’에 직면한 많은 사람들은 환각에 취하거나 종교적 광신에 빠지거나 자살을 선택한다. 카뮈는 자살이 소극적 도피일 뿐이라 생각했다. 진정한 자유인은 큰 바위를 밀고 산으로 올라가 추락하는 신화 속의 시지프스처럼 성실하게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 싸워야만 한다. 때문에 카뮈는 무신론자에게도 자살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카뮈의 “부조리' 문학은 1980-90년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됐다. <<이방인>>, <<페스트>> 등 카뮈의 소설은 1980년대 이후 중국의 문인들에게 중국 현실의 부조리를 돌아보는 큰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다. 2002년에야 중국에서 <<카뮈 전집>>이 처음 출판됐지만, 카뮈는 오늘날도 중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20세기 외국작가 중 한 명이다. 문혁 이후 많은 중국의 독자들이 카뮈의 작품을 탐독했다. 일부 문인들은 카뮈의 영향 아래 아방가르드 작품을 창작했다.

“공산당원의 자살은 반역이다.”

중국의 문인들에게 카뮈의 작품이 큰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중국의 현대사에서 수많은 지식인들이 군중 폭력과 국가 테러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 아닐까? 감당키 어려운 혁명의 부조리 속에서 수많은 인민은 자살 충동에 시달렸기 때문이 아닐까? 페스트가 창궐하여 봉쇄당한 가상 도시의 이야기가 중국인들에게 현대사의 어둠을 상기시키기 때문은 아닐까?

<2015년 중국 베이징대학 출판사에서 나온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표지>

마오의 주치의 리즈수이(李志綏, 1919-1995)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부인은 문혁 시절 남편이 혹시나 문혁 개시 직후 갑자기 목숨을 끊은 마오의 비서 톈자잉(田家英)처럼 자살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의 부인은 그에게 늘 말했다. “절대 자살하지 마요. 자살하면 우리 모두 끝장나요.” 1950-60년대 중공정부는 개인의 신체를 사회주의 혁명의 도구로 삼았다. 자살은 “당을 배신하고 인민을 저버리는” 최악의 반혁명 행위로 인식됐다. 유가족은 평생 ‘반역자’의 굴레를 쓰고 오지에 추방당해 강제노역을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과연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자살을 해야만 했나?

51회 이미 살펴봤듯, 1968-1969년 절정에 달했던 청계 운동은 최고영도자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숨어 있는 가상의 적인들을 제거하는 대규모의 국가테러였다. 그 과정에서 3천 만 명이 극심한 피해를 당했다. 그중 적게는 48만 명, 많게는 108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가족까지 합산할 경우 청계운동의 피해자는 1억 명에 달한다. 7, 8명 중 한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는 얘기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상에 알려진 정부의 공식 통계 몇 가지만 짚어보면······.

<베이징 근교 광루좡(廣錄莊) 대대(大隊)에서 벌어지는 “우귀사신 소탕 대회”의 장면/ 공공부문>

1. 랴오닝의 다칭(大慶) 유전(油田)에선 1968년 1월-4월 15명이, 5월-6월엔 36명이 잇달아 자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2. 1968년 1월에서 1969년 5월까지 베이징의 청계 운동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3731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94%가 자살이었다.

3. 비슷한 시기 저장(浙江)성에선, 10만 명이 구속돼서 비투를 당했고, 그 과정에서 9198명이 가혹 행위로 죽거나 못 견디고 자살했다.

4. 1968년 말까지 안후이(安徽)성에선 43만 명이 각종의 악질분자로 낙인찍혀 능욕, 구타, 체벌, 고문, 자백강요 등 10여 종류의 혹형을 받았다. 1969년 4월의 통계에 따르면, 그 43만 명 중에서 188만8225명이 감금당했고, 그 중에서 4646명이 구금 상태에서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자살했다. 산 채로 맞아죽은 사람도 1074명에 달했다.

5. 지린(吉林)성에선 1968년 4월에서 9월 말까지 다섯 달에 걸친 청계 운동의 과정에서 2127명이 자살하고, 3459명이 불구가 됐다.

6. 윈난(雲南)성 혁명위원회 청계 운동 사무소의 집계에 따르면, 1969년 8월, 44만8000명이 잡혀서 조사를 받았다. 그중에서 1만5000명이 “청소하고 정리될” 대상으로 지목되어 가혹행위를 당했다. 그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이 6979명에 달했는데, “모두가 강압에 못이긴 자살이었다.”

물론 상기 사례들은 전체 자살자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재미 연구가 딩수(丁抒)는 문혁 초기 자살자의 총수를 10만-20만 정도로 추산한다.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들을 모두 색출해서 군중 앞에 보이라!” 문혁 당시 군중집회의 집단 린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군추도(群醜圖)”/chineseposters.net>

공산주의자들은 자살을 반혁명 행위라 비판한다. 문혁 당시의 사회분위기에서 자살자는 일말의 동정도 받을 수 없었다. 20세기 중국문학의 대가 바진(巴金, 1904-2005)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당시엔 모두가 미쳤었다. 잘 아는 사람이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려도 동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집회를 열고 비판을 했다. 고성으로 구호를 외치면서 악독한 언어를 써서 죽은 자를 공격해댔다.”

이처럼 살아남은 군중이 사자(死者)의 영혼까지 짓밟고 찢었음에도 자살자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중공중앙의 주요 인사들은 청계 운동의 강도 조절을 요구하고 나섰다. 1968년 5월 공안부 장관 셰부츠(謝富治, 1909-1972)는 청계 운동의 광열 속에서 자살자가 속출하자 광폭한 “자살풍(自殺風)”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반동분자가 자살을 하면 더 많은 악질분자의 색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중앙문혁소조의 핵심인물 캉성(康生, 1898-1975)은 “투쟁의 기술을 정교하게 쓰라” 요구하면서 “몇 명 죽는 거야 상관없지만, 더 중요한 사건의 단서가 소멸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물론 상부의 지시는 자살의 광풍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작가, 언론인, 과학자, 학생들의 목숨 건 저항

카뮈는 어떤 경우라도 자살은 부당하다고 주장했지만, 1949년 이래 중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을 들추다 보면 그들이 어쩌면 목숨을 걸고 부조리에 저항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950년대 초부터 자살자들 중에는 작가, 언론인, 과학자, 학생 등등 지식분자들이 많았다.

일반적으로 지식분자들은 자존심이 남다르고 명예를 중시한다. 근대 문명국의 재판과정과는 달리 1950-60년대 중국의 정치운동은 피의자를 군중집회에 끌고 와서 모욕주고 구타하는 인격살해의 폭력이었다. 군중의 집단린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할퀴고 짓밟힌 인간은 사회적 사망을 면할 수 없다. 사회적 사망 선고를 받은 자에겐 어쩌면 자살이 최후의 항변일 수 있다.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제1기 전국 정협(政協)위원으로 활약했던 저우징원(周鯨文, 1908-1985)은 1956년 12월 홍콩으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홍콩에 체류하면서 반(反)중공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1959년 홍콩에서 출판된 그의 저서 <<10년의 폭풍: 중국 홍색정권의 진면모>>는 50년대 정치 운동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 책에서 저우징원은 1950년대 초반 “진압반혁명분자” 운동 당시 이미 55만이 자살했고, “삼반(三反)·오반(五反)” 운동(1951-52) 당시 25만이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이 수치를 입증하는 정부의 통계는 없지만, 1950년대부터 중국에선 대규모의 자살자가 나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살을 막기 위해 상하이에선 수면제의 판매를 금지하고, 목재 절약의 명분으로 위해 관(棺)의 제작도 금지시켰다. 그럼에도 1950년대 상하이의 공원과 길거리에는 자살자의 시신이 흔히 보였다.

예컨대 저우징원의 기록에 따르면, 베이징 강철학원에서 한 학생이 부당한 집회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후 캠퍼스 중앙의 높은 굴뚝 위에 올라가서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한 후, 투신하여 회색 시멘트 바닥에 선혈을 흩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1950년대 정치 운동의 피해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던져 저항했음을 보여주는 실례다.

문혁 시기, 스스로 목숨 끊은 지식인들

지식인의 자살은 문혁 당시 최고조에 이르렀다. 세상에 알려진 구체적인 자살 사례를 뜯어보면, 인격을 유린당한 후 절망의 늪에서 죽음으로 도피한 경우도 보인다. 반면 자살을 통해 불의에 항거한 경우도 적잖다.

1945년 영역 출판되어 뉴욕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낙타상자(駱駝箱子, Rickshaw Boy)>>”의 작가 라오서(老舍, 1899-1966)는 문혁 초기 베이징 공묘(孔廟)의 문지방에서 “현행 반혁명분자”의 플래카드를 쓰고 홍위병들에게 구타와 모욕을 당했다. 바로 다음 날 (1966년 8월 24일) 이른 새벽 라오서는 타이핑호(太平湖)에 몸을 던졌다.

<문혁 시기 홍위병에 모욕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작가 라오서의 모습/ 공공부문>

현대 중국의 저명한 신(新)유가 철학자 슝스리(熊十力, 1885-1968)는 문혁 발발 직후부터 홍위병의 집회에 불려 나가 수모를 겪었고, 그의 자택은 파괴됐다. 홍위병의 만행에 비분강개한 노학자는 중공중앙에 항의 서신을 쓰는 투쟁을 이어갔다. 청계 운동이 전국적으로 시작되던 1968년 봄부터 그는 음식을 거부하고 집필에 몰두하다 5월 23일 84세로 서거했다.

이밖에도 문혁의 광풍 속에서 자살을 택한 지식인들은 수없이 많다. 자살자의 직업 분포를 보면 대학·전문학교, 문인협회, 예술단체에 집중돼 있었다. 자살의 방법으로는 높은 데서 뛰어내리거나 목을 매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물에 뛰어들거나 고압전류를 만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상하이 등 대도시에서는 가스 질식사도 빈번했다. 고위 관리들은 수면제 과다복용을 선택했다. 잰보짠(翦伯贊, 1898-1968)과 그의 부인 다이수완(戴淑婉)처럼 지식인 부부가 동반 자살하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또 먼저 죽은 배우자를 곧 따라 죽는 경우도 상당수였다.

베이징 대학의 동방어문학부 교수 지셴린(季羨林, 1911-2011)은 “우붕(牛棚, 소우리)”이라 불리던 캠퍼스의 사설 감옥에 갇혀 장시간 구타, 고문, 심문, 강제노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30년 가까이 지난 1996년에야 그는 우붕의 실체험을 기록한 회고록 “우붕잡억(牛棚雜憶)”을 출판했다. 그는 고통 속에서 날마다 죽음을 생각하며 자살을 계획했지만, 마지막 순간 가까스로 삶의 지푸라기를 붙잡았다. 이제 지셴린의 체험담에 귀 기울일 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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