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플로터의 선구자 또는 막슛의 달인' 데니스 에드워즈

김영훈 2021. 4. 10.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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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1년 3월호에 게재됐습니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엄청난 득점력. 괴상한 슛폼. 막슛 또는 플로터의 선구자. 올드팬들은 이렇게만 들어도 벌써 생각나는 선수가 있을 것이다.

안양 SBS에서 뛰었던 데니스 에드워즈(192cm, 포워드). 에드워즈는 현재까지도 앞서 언급한 수식어들로 회자되고는 한다.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에드워즈의 이야기들을 되짚어보려 한다.

플로터 또는 막슛
플로터는 오버핸드로 던져 높은 포물선을 그리는 슛이다. 현대 농구에서 플로터는 운동능력이 좋은 선수들의 블록을 피하기 위해 자주 쓰인다. 정확히 역사를 추론하기 힘들지만, 1970년대 또는 80년대 즈음부터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플로터라는 기술이 한국에 처음 전해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는 플로터보다는 ‘막슛’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했다.

당시 한국 농구에서 처음 플로터를 선보였던 인물이 바로 데니스 에드워즈였다. SBS에서 뛴 에드워즈는 ‘막슛’으로 많은 화제를 모았다. 물론, 무언가 엉성한 스텝과 높은 포물선의 슛은 지금의 플로터와도 조금의 거리는 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자신의 기술을 두고 플로터와 러닝 훅슛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플로터가 익숙지 않았던 당시 한국 농구에서는 이를 알 리가 없었다. 그저 막슛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어느덧 시대가 변하면서 한국 농구에도 플로터라는 기술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NBA가 보편화되면서 점점 플로터라는 기술을 볼 일이 많아졌다. 토니 파커의 ‘티어 드롭’이 대표적이었고, 한국에서도 이현민, 주희정 등이 시도하면서 점점 대중화되었다.

자연스레 에드워즈에 대한 시선도 달라졌다. 그저 득점력 좋은 ‘막슛의 대가’로 알려졌던 에드워즈는 ‘시대를 앞서간 선수’라는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에드워즈, 그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에드워즈는 누구인가.

에드워즈는 포트헤이스 주립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이름이 낯설다. 우리가 흔히 아는 디비전1에 속한 대학이 아니다. 디비전2에 속했다. 당시 KBL에는 디비전1 대학 출신의 외국 선수가 대부분이었다(많은 선수들이 1부 대학 출신이었지만, 종종 3부 대학 출신도 있었다. 대표적인 선수가 존 와센버그였다).

하지만 간판은 중요치 않았다. 2부 대학을 나온 에드워즈는 NBA만을 바라봤다. 현재는 G리그로 통합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NBA 하부리그에 USBL, CBA 등이 있었다. 에드워즈는 그중 하나인 CBA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에드워즈의 기량은 출중했다. 블랙힐 소속으로 뛴 그는 1996-1997시즌 평균 33.6점을 올리며 MVP를 수상했다. 하지만 그를 찾아주는 팀이 없었다. 3명의 자녀를 키우던 에드워즈는 하는 수 없이 꿈보다는 돈을 좇아야 했다.

그가 택한 나라는 한국이었다. 물론, 한국을 선택한 이유에 돈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당시 인터뷰에서 연간 7만 달러의 연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한국을 택한 이유 중 가장 큰 요인이라고 밝혔다. CBA에서 1년을 뛰어도 그가 받던 돈은 3만 달러가 전부. 에드워즈에게 7만 달러는 매우 큰 돈이었다.

에드워즈가 뛰게 된 팀은 안양 SBS 스타즈. 김인건 감독이 이끌던 SBS는 득점력을 높이기 위해 그를 영입했다.

SBS가 원했던 효과는 곧바로 드러났다. 에드워즈는 개막전부터 40점을 몰아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특유의 슛 동작을 향한 비웃음도 에드워즈의 엄청난 야투 정확도 앞에 빠르게 사라졌다.

에드워즈의 득점력이 더 놀라웠던 점은 꾸준함 때문이었다. 그는 00-01시즌 45경기 전부 출전해 모두 두 자릿수 득점을 올렸다. 정확도도 높았다. 45경기 중 2점슛 성공률이 50% 이하였던 적은 4번 밖에 없었다. 남들에게는 괴상한 슛폼이었지만, 에드워즈에게는 계산된 슛이었다.

에드워즈는 폭발력도 뛰어났다. 에드워즈는 2000년 12월 9일 열린 창원 LG전에서 45점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12월 12일 열린 다음 경기에서는 56점을 몰아쳤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2월 23일 창원 LG전에서는 57점을 몰아넣으며 자신의 기록을 1점 더 높였다.

1시즌 내내 엄청난 득점력을 선보인 에드워즈는 한 시즌 평균 33.4점 9.1리바운드 4.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3.4점은 피트 마이클이 평균 35.6점을 기록하기 전까지 한 시즌 최다 평균 득점이었다.

에드워즈를 보유한 SBS는 정규리그 4위를 기록했다. 그리고는 6강 PO에서 인천 신세기 빅스(전자랜드)를 꺾고 4강에 진출했다. 잘 나가던 SBS는 4강에서 삼성을 만났다. 당시 정규리그 1위 팀이었던 삼성은 아티머스 맥클래리, 이규섭 등이 포진해 있었고, SBS는 끝내 삼성의 벽을 넘지 못하고 4강에서 마무리한다.


엄청난 득점력, 뛰어난 몸관리에도 재계약 실패...그 이유는?

당시 SBS 선수들은 에드워즈의 득점력에만 놀란 게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선수들은 몸관리 시스템이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자신의 몸을 철저히 관리하며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일례로 에드워즈는 한국에 올 때부터 많은 운동 기구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한국에는 이러한 장비들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때문에 에드워즈 입국 당시 엄청난 추가 금액이 붙었다는 후문이다.

또한, 에드워즈는 경기가 끝난 후 밤에도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개 선수들은 휴식을 취하지만, 에드워즈는 밤새 운동에 매진하며 근육량을 유지하는데 신경을 기울였다.

심지어 에드워즈는 운동을 한 후에는 난방을 틀지 못하게 했다. 몸이 따뜻하면 근육이 풀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때문에 경기가 끝난 뒤 SBS의 버스에는 항상 에어컨이 가동됐다. 이는 한겨울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술과 담배도 멀리한 에드워즈는 몸관리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 선수였다.

그만큼 모두의 인정을 받을 만한 프로 자세를 갖춘 선수. 하지만 불만은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득점력이 너무 뛰어난 탓에 자존심이 강했던 게 문제였다. 에드워즈는 항상 자신에게 공이 있는 것을 원했다. 높은 정확도에 꾸준한 득점력을 갖췄기에 어찌 보면 당연했을 수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득점과 별개로 팀은 패할 때가 많았다. 상대는 에드워즈에게 점수를 주는 대신 다른 선수들을 막는 방법을 택했다. 실제로 에드워즈가 56점을 올린 경기에서도 팀은 졌고, 40점 이상 올리는 경기에도 팀은 패할 때가 많았다.

당시 포인트가드를 맡았던 연세대 은희석 감독은 “포인트가드로서 종종 힘들 때가 있었다. 에드워즈의 득점력은 좋았지만, 공이 자신에게만 주어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김성철(현 DB 코치)의 기량이 매우 좋았다. 그래서 둘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다”며 숨겨진 비화를 밝혔다.

더구나 에드워즈는 192cm의 신장 때문에 미스매치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득점을 많이 올리더라도 상대에게 많은 실점을 내주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이렇듯 에드워즈에게는 장점도 확실했지만, 단점도 명확했다. 결국 SBS는 고심 끝에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면서 역대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였던 득점왕은 한 시즌 만에 KBL을 떠나게 됐다.


에드워즈, 그의 KBL에서 마지막 발자취

에드워즈는 다음 시즌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지만, 다른 구단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이는 다음 시즌 트라이아웃도 같았다.

그러나 한국과는 이제 연이 없을 것 같았던 에드워즈에게 한 번의 기회가 생겼다. 02-03 시즌을 앞두고 울산 모비스의 채드 헨드릭이 부상을 당한 것. 모비스는 대체 선수로 에드워즈를 영입했다.

영입 당시만 해도 일시교체였던 에드워즈는 시즌 초반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연일 득점포를 가동하며 팀에 승리를 선사했고, 이에 모비스 구단의 생각도 달라졌다. 8주만 같이 있으려고 했던 모비스는 방향을 선회, 에드워즈를 완전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에드워즈는 여전히 뛰어난 득점 감각을 뽐냈다. 그리고 그는 전 시즌 최하위였던 팀을 6위로 올려놓으며, 플레이오프 티켓을 안겼다. 비록 6강 PO에서 원주 TG(해당 시즌 우승 팀)에게 패하며 물거품이 되기도 했으나, 에드워즈만큼은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냈다.

한 시즌 만에 돌아와 모비스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였던 에드워즈. 그러나 이후 다시 그가 한국 땅을 밟을 일은 없었다.

두 시즌 동안만 활약했던 에드워즈. 그가 한국에 있었던 시간은 짧았지만, 엄청난 임팩트와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슛폼 등. 에드워즈가 한국에 남기고 간 것은 많았고, 지금도 여러 사람들의 기억 속에 회상되고 있다.

사진 제공 = KBL

바스켓코리아 / 김영훈 기자 kim95yh@baske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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