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통께 순수 혈통 바치자".. 나치는 아이를 납치했다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
잉그리트 폰 욀하펜·팀 테이트 지음|강경이 옮김|272쪽|1만6000원
“총통께 아이를 드리자!”
1930년대 후반 유럽, 나치당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설 ‘레벤스보른’에서 출산하는 여성들에게 부여된 의무는 이런 구호로 요약됐다. 이곳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나치 깃발이 드리우고 히틀러의 흉상이나 사진이 놓인 제단에서 명명식을 거쳐 친위대와 히틀러에게 바쳐졌다.
‘생명의 샘’을 뜻하는 고대 게르만어 ‘레벤스보른(Lebensborn)’은 1935년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가 순수 아리안 인종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계획한 프로젝트 이름이다. ‘나의 투쟁’(1925)에서 “아리아인이 우월한 인류의 시조”라며 “우리 피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밝혔던 히틀러는 4년 뒤 당대회 연설에서 “독일이 한 해에 100만 명의 아이를 얻고, 70만~80만의 나약한 자들을 제거한다면 궁극적으로 국력은 증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총통의 가장 열렬한 심복이었던 힘러는 같은 해 “우리가 독일과 주변에서 북유럽 인종을 성공적으로 다시 일으키고, 이 모종판에서 우리 종족 2억 명이 생산된다면, 그때 세상은 우리 것이 될 것”이라고 연설했다.
1935년 ‘독일 혈통 수호를 위한 법률’인 뉘른베르크법 발표 이후 힘러는 한 발 더 나아갔다. 금발에 푸른 눈, 흰 피부, 그리스 조각 같은 코…. 인종적으로 순수한 아리아인 남녀는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성관계를 갖고 아이를 낳을 것을 명령받았다. 혼외 자녀라도 상관없었다. 친위대와 경찰의 젊은이들은 ‘우수 독일 국민의 아버지’로서 곳곳에 씨를 뿌릴 것을 강요받았다.
‘좋은 피’를 물려받은 아이들을 생산할 미혼 임신부의 출산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레벤스보른 출산 시설이 독일과 점령국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등 모두 스물다섯 군데에 마련됐다. 30년 안에 600개 연대, 약 30만 명의 인구를 추가로 얻는 것이 계획의 목표였지만 최소 네 자녀를 두라는 의무를 부여받은 친위대의 출산율은 1인당 1.5명 정도에 머물렀다. 레벤스보른 시설에서 출산을 희망한 임신부 가운데 절반 이상은 엄격한 기준 때문에 거부당했다. 그러나 1941년 무렵 전쟁은 한 주에 독일인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힘러는 새로운 전략을 세웠다, 군대와 관료에게 점령국에서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 아이들을 납치하라고 비밀 지시를 내렸다. 이 계획의 이름은 ‘독일화’라고 붙여졌다. 납치된 아이들은 친위대원이나 정치적·인종적 심사를 통과한 독일인 가정에서 길러졌다.
저자 잉그리트 폰 욀하펜(80)은 생후 9개월 때 유고슬라비아에서 납치돼 독일인 군인 자녀로 키워졌다. 열 살 무렵 자신이 데려온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전쟁 고아 중 하나이겠거니 생각했다. 물리치료사로 일하던 그가 출생에 얽힌 끔찍한 비밀을 알게 된 건 58세 때인 1999년, “친부모를 찾고 싶냐”며 적십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서다. 이후 그는 오랫동안 회피해 왔던 질문,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와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양어머니가 숨겨둔 입양 관련 서류와 국가 기록을 단서로 뿌리를 찾아 나선다. 같은 처지의 ‘레벤스보른의 아이들’과 연대해 2006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위대한 아리안 제국’ 건설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이 잔혹한 범죄를 세상에 알린다.
‘우수 인종의 미래 지도자’로 선택받아 히틀러에게 바쳐진 아이들의 미래는 끔찍했다. 나치의 반인륜적 행위와 연계돼 있다는 낮은 자존감, 부모를 모른다는 외로움에 평생을 시달렸다. 특히 금발에 푸른 눈이 아리아인의 특성과 가장 부합한다 여겨져 레벤스보른 프로젝트의 핵심 기지 역할을 했던 노르웨이에선 히틀러 패망 이후, 독일 병사와 관계한 여성 3000~5000명이 나치 부역자로 지목받아 강제수용소 생활을 했다. 아이들은 사회에서 배척됐다.
작고 가벼운 책이지만 주제 의식은 묵직하다. 광기 어린 인종주의가 낳은 역사적 결과물을 돌아보는 일은 흑백 갈등에 이어 아시아인 혐오 범죄가 국제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현재를 짚어보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이야기인 척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는 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당신이 읽는다면 이 이야기를 살아내는 일도 쉽지 않았음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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