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화백의 '동심'.."아직도 벽만 보면 선 긋고 싶다"

전지현 2021. 4. 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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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은유의 섬' 여는 오세열 작가
길거리서 주운 물건들을
작품에 부착해 의미 부여
쓰레기 더미 보면 기뻐
숫자에 매달려 사는 인간
1~10 빽빽이 채워 표현
이목구비 못 갖춘 인물화
현대인 소외·불안 드러내
`무제`(53×45㎝) [사진 제공 = 학고재]
함지박에 코와 입, 팔 하나가 없는 남자가 우스꽝스럽게 그려져 있다. 서울 학고재갤러리 개인전 '은유의 섬'에서 만난 오세열 화백(76)은 "내가 봐도 코믹해서 가끔 웃는다"고 했다. 어린이 낙서처럼 단순한 선으로 이룬 그림이다. 그는 "잘 그리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잘 그려봐야 싫증난다"고 말했다.그림 속 남자 옷에 실제 단추가 달려 있고, 작품 하단에는 자갈 몇 개가 부착돼 있다. 찻숟가락, 플라스틱 뚜껑, 포장 비닐용 칼, 조개, 와인 코르크마개, 연필 등 일상 물건들이 그의 작품을 장식한다. 거기에 딱 필요한 오브제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붙어 있다."걷는 것을 좋아해 길거리에서 주운 것들이에요. 버려졌지만 제가 집어서 작품 속 역할을 주면 존재감이 생기고 주목하게 되요. 거기에 매료돼 쓰레기 더미를 보면 기뻐요." 
포장지도 가위로 오리거나 손으로 찢어서 그림에 붙인다. 각종 오브제 중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게 단추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그는 "가장 흔한게 단추다. 옷에서 하나 떼주면 작품에 쓰겠다"며 농담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작업의 즐거움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정상적으로 그리면 재미가 없죠. 사실적으로 그릴려고 했는데 나중에 추상이 돼 버리기도 해요. 그릴 때마다 감성이 달라져 나도 어떤 작품이 나올지 몰라요. 처음 생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전혀 다른 그림이 나와요."
`무제`(112×145.5㎝) [사진 제공 = 학고재]
그가 사는 경기도 양평 자연도 그림 속으로 들어온다. 지난 가을 작업실 근처 용문사에 수북이 쌓인 은행잎이 떠올라 노란색으로 채운 작품이 이번 개인전 서막을 연다. 봄꽃도 그의 작품에 피어 있다."대전 목원대에서 30여년 학생들을 지도한 후 양평으로 이사온 지 7년 됐어요. 나이를 먹으면 자연으로 돌아가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왔나' 돌아보고 마무리를 잘 해야죠. 어차피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가요."그렇다고 자연을 직접 보면서 그리지는 않는다. 추억과 상상에 기댄다. 그는 "어린아이가 낙서하듯 무의식적으로 그린다"며 "그리고 지우다보면 내가 생각지도 못한 형상이 보이며, 우연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화면에 색채를 여러겹 쌓아올린 다음에 못과 면도칼 등 뾰족한 도구로 긁어낸다. 그는 "화면을 내 몸이라고 생각하고 상처를 낸다. 어릴적 6·25전쟁을 겪고 보니 부모 곁을 떠난 아이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면서 내 마음을 치유했다"며 "붓질을 하면 색이 흐려져서 면도칼로 새겨 화면을 선명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무제`(72×90㎝) [사진 제공 = 학고재]
`무제`(91×72.5㎝) [사진 제공 = 학고재]
그의 상처를 화면에 옮겨서인지 어린이 낙서 같으면서도 깊은 여운을 준다. 이목구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두 다리에 신발 하나 신은 인물은 현대인의 소외와 불안을 의미하는 듯하다. 전시장에서 그의 그림에 감정이입해 눈물을 흘리는 관람객도 있다."보는 사람에게 상상의 여유를 주기 위해 눈·코·입을 생략해요. 제 그림에 정상은 없어요. 팔 하나만 있어도 자연스러운 인물화가 하루 아침에 되는게 아닙니다."

이번 전시작에도 숫자가 암호처럼 등장한다. 1부터 10까지 화면을 꽉 채우기도 하고 작품 일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

그는 "우리는 평생 숫자를 떠나서 살 수 없다"며 "숫자가 주는 행복과 불행에 파묻혀 산다"고 말했다.

`무제`(33.5×44㎝) [사진 제공 = 학고재]
`무제`(145.5×112㎝) [사진 제공 = 학고재]
오래된 묵은지나 된장처럼 바랜 색채와 밀도 높은 화면이 인상적이다. 화가들은 나이들 수록 힘을 뺀다는데 그는 왜 더 에너지를 쏟아낼까."다행히 아직 기력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 수도 있어 한 작품에 매달리는 시간이 늘었고 생각이 깊어졌죠."

그는 아직도 하얀 벽만 보면 선을 긋고 싶은 개구쟁이 같은 동심(童心)이 살아 있다고 한다. 전시는 5월 5일까지.

오세열 작가. [사진 제공 = 학고재]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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