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안목·시간·노력..기꺼이 내어놓은 40,400점 [도재기의 현대미술 스케치 (11)]

도재기 선임기자 2021. 4. 9.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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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 그 숭고함

[경향신문]

손창근씨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국보 180호)의 전시 모습.

‘3만6433점’ ‘3967점’.

한국을 대표·상징하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 이후 지금까지 각각 기증받은 문화재·미술작품 숫자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체 소장품 41만3000여점 가운데 기증품이 약 8.8%를 차지한다. 첫 기증이 이뤄진 1946년부터 현재까지 개인·단체·동일 기증자의 추가 기증을 포함해 모두 380건의 기증이 이뤄졌다.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다양한 유물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체 소장품 8500여점 가운데 기증품 비율이 약 45%다. 1971년 첫 기증 이래 모두 600여명(단체·기업 등 포함)이 회화와 조각·사진·설치미술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기증해왔다.

기증과 관련해 최근 큰 관심을 모으는 것은 이건희 삼성 회장이 소유권을 갖고 있는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의 향방이다. 국보·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가 100점이 넘는 명품 문화재들과 유명 작가의 명작이 다수 포함된 국내외 근현대 미술품 등 모두 1만3000여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부터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를 추진한 이건희 회장에 이르기까지 70여년에 걸쳐 대를 이어 수집한 컬렉션이다.

이 컬렉션이 홍라희 전 리움 관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유족들로 상속되는 과정에서 일부 기증·처분될지, 그대로 유지될지 등 그 처리에 이목이 쏠린다. 기증된다면 삼성문화재단(호암미술관·리움), 중앙박물관, 현대미술관에 각각 어떤 작품이 얼마나 기증될지 예측들도 나돈다. 물론 소장품의 성격에 따라 다른 공기관으로의 기증도 할 수 있다. 미술계 등의 기대감이 반영된 기증이 이뤄진다면 개인 컬렉션의 사회환원사를 다시 쓰는 일이다.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소장품을 기증해왔다. 기증은 숭고한 일이다. 자신의 안목과 시간과 노력, 막대한 돈을 들여 애써 수집한 소장품을 사회 모두를 위해 내놓는 것이다. 내 것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기증은 사적 소장품을 공적 소장품으로 공유화하는 것이다. 공적 전시를 가능케 해 보다 많은 사람이 감상하고 즐길 수 있다. 학술 연구로도 사용돼 우리 역사와 문화가 더 풍성해진다. 그래서 기증은 영원히 기억되고, 모두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유족들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고희동의 ‘자화상’(1915, 캔버스에 유채, 61×46㎝, 국가등록문화재 487호).
박주환씨가 기증한 이상범의 ‘초동’(1926, 종이에 수묵담채, 152×182㎝, 국가등록문화재 532호).
갤러리현대가 기증한 백남준의 ‘잡동사니 벽’(1995, 모니터·자동차 부품·트럼펫 등, 가변크기).
유족들이 기증한 오지호의 ‘남향집’(1939, 캔버스에 유채, 80×65㎝, 국가등록문화재 536호). 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나눔과 공유의 선한 영향력

중앙박물관 소장품 구입 예산 39억·현대미술관은 48억…
추사 김정희 ‘세한도’ 비롯 고희동 ‘자화상’ 등 기증되지 않았다면 소장 힘든 작품들
사적 소장품 공유화하는 ‘기증’, 학술 연구로도 사용돼
역사·문화 더 풍성해져…그래서 영원히 기억되고, 존경받아 마땅

지난 4일 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되어온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 평안’전이 막을 내렸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국보 180호)를 비롯해 18점의 전시품이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호응을 받았다. 관람객이 특히 관심을 보인 것은 ‘세한도’다. 제작 배경이나 작품에 발문처럼 붙어 있는 한국과 중국 서화가 20명의 감상평, 일본으로의 유출과 돌아온 과정, 소장가 기증 등의 사연으로 유명하지만 평소 보기가 어려운 작품이어서다.

많은 관람객의 ‘세한도’ 감상은 소장가인 손창근씨(93)의 기증으로 가능해졌다. 손씨는 2011년 이래 박물관에 기탁해온 ‘세한도’를 지난해 2월 기증했다. 아들 손성규 연세대 교수 등도 쉽게 볼 수 없을 정도로 소중히 간직해온 ‘세한도’를 모두를 위해 내놓은 것이다. 지난 전시회에는 그 기증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사실 손씨는 2018년에도 202건 304점의 유물을 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추사의 유명 작품 ‘불이선란도’, 최초의 한글 서적인 15세기의 ‘용비어천가’ 초간본(1447년)을 비롯해 유명 서화가의 작품·인장 등이다. 개성 출신 실업가인 부친(손세기)에게 물려받고 수집해온 개인 컬렉션을 공공화시킨 것이다. 앞서 손세기씨는 1974년 서강대에 ‘양사언필 초서’(보물 1624호) 등 고서화 200점을 기증하기도 했다. 수집과 기증, 나눔 정신이 대를 이어 계속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 ‘박병래실’의 ‘백자 청화 꽃무늬 조롱박 모양 병’(보물 1058호).

현재 중앙박물관 2층에는 기증관이 있다. 기증자들의 이름을 딴 전시실, 기증된 문화재들을 엄선해 선보이는 기증문화재실 등으로 구성됐다. 또 후원금 기부자들의 이름을 새긴 명패 등도 있다. 4900여점의 유물을 기증한 동원 이홍근씨(1900~1980)의 ‘이홍근실’을 비롯해 전 홍익대 미대 교수 유강열씨, 치과의사 박영숙씨, 법조인 최영도씨와 유창종씨, 의사 박병래씨, 서양화가 김종학씨, 일본인으로 아시아 각국 문화재 1000여점을 기증한 가네코 가즈시게를 비롯해 하치우마 다다스·이우치 이사오의 기증실 등이 마련됐다.

기증문화재실에서는 손기정씨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기념으로 받은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보물 904호), 실업가 남궁련씨가 기증한 고려시대의 ‘짐승 얼굴무늬 풍로’(귀면 청동로·국보 145호) 등의 기증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특히 ‘성문종합영어’로 유명한 송성문씨의 기증품에는 국보(4점)와 보물(22점)만도 26점에 이른다. 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유물 가운데 국보·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는 모두 59건이다. 그동안 기증된 유물들의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 잘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개인 컬렉터와 기업, 갤러리, 작가와 유족 등을 비롯한 다양한 기증자 600여명의 기증 작품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71년 첫 기증 이래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개인 소장품이 현대미술관에서 연구와 보존, 전시 등을 통해 그 가치와 의미가 더 널리 빛나고 있는 것이다. 현대미술관에 따르면, 기증 작품들 중에는 예술적·미술사적 가치와 더불어 역사적 중요성이 높은 등록문화재도 5점이 있다. 1972년 기증된 한국 첫 서양화가 고희동의 1915년 작품인 ‘(부채를 든) 자화상’을 비롯해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의 1930년 말 작품인 ‘론도’, 초겨울 풍경을 담은 이상범의 ‘초동’, 이영일의 ‘시골 소녀’, 오지호의 ‘남향집’ 등이다.

중앙박물관, 현대미술관에는 기증되지 않았다면 소장하기 힘든 작품들이 아주 많다. 중앙박물관의 올해 소장품 구입 예산은 39억7900만원, 현대미술관은 48억원으로 웬만한 유물이나 현대미술품의 구입이 어려운 상황이다. 기증자들의 선한 의지가 우리 역사와 문화 진흥·발전에 얼마나 크게 이바지하는지를 방증한다.

■ 2000여년의 ‘장무상망’, 계속돼야

소장품 중 기증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8.8%, 현대미술관이 45%…
루브르·뉴욕 현대미술관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
기증 활성화 위해 기증자 이름 되새기고, 컬렉션 꾸리고,
표창·훈장 등‘화끈한 예우’…그게 경의요, 인간적 예의

중앙박물관과 현대미술관 소장품 중 기증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국제적으로 이름난 미술관·박물관들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루브르박물관,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은 하나같이 컬렉터들의 기증과 기부 후원이 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소장품 가운데 기증품 비율이 대부분 70%를 웃돈다. 기증 문화가 보편화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세제 혜택이나 미술품 물납제 등 다양한 법적·제도적 장치들로 기증을 유도하는 등 기증 문화 활성화 덕택이다.

중앙박물관, 현대미술관도 물론 더 많은 기증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증자의 이름을 되새기고, 기증품 컬렉션을 꾸리고, 기증 작품·작가 특별전 같은 전시회도 마련해 널리 알린다. 박물관·미술관의 전시회나 각종 행사에 초대하거나 때로는 표창·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애쓰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선진국이라는 외국 기관들에 비해 그 예우가 약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증은 적은 예산의 문제를 극복하고 가치 높은 문화재와 미술작품을 소장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해당 기관과 정부의 기증 활성화 노력이 절실하다. 화끈한 예우를 하고, 기증자를 기리고 기증품을 널리 알리는 일에도 더 열성적으로 나서야 한다. ‘현대판 메디치가’ 활성화, 사회 공동체를 위한 나눔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을 이끄는 것이다.

남궁련씨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고려시대의 ‘짐승 얼굴무늬 풍로’(귀면 청동로·국보 145호).

물론 기증한다고 해서 박물관·미술관이 무조건 모두를 받아들여서도 안 되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진위의 검증, 수장고의 능력이나 관리 인력 등 여러 고려 요소가 있지만 그 무엇보다 해당 기관이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장품은 박물관, 미술관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자부심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에 따라 중앙박물관과 현대미술관도 일정한 절차를 거쳐 기증을 받는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의위원회 등을 운영하며 기증품이나 작가의 역사적·예술적·미술사적 가치 등을 따져 소장 여부를 결정한다.

지금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3만6000여점의 문화재,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3900여점의 미술작품은 문화 향유 확대는 물론 박물관·미술관 소장품의 양적 확대와 질적 수준 제고에 기여했다. 또 소장품의 다양성 확보 등 갖가지 큰 의미도 지닌다. 추사의 ‘세한도’ 화면 오른쪽 아래에는 ‘長毋相忘(장무상망)’ 낙관이 찍혀 있다. 2000여년 전 중국 한나라의 와당에 새겨진 글귀로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누구나 아름다운 존재를 사랑하고 아낀다. 기증자는 그 아낌과 사랑을 함께 나눈 것이다. 이제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을 찾는다면 기증자들과 그들의 넓고 깊은 뜻을 한번쯤 되새겼으면 좋겠다. 그것이 그들의 노력, 안목에 대한 경의이자 인간적인 예의이다.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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