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말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 / 이주은

한겨레 2021. 4. 9.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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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라디오 청취자를 대상으로 매주 예술가와 작품을 소개한 적 있었다.

작품을 이미지 없이 말로만 설명하기에는 늘 한계가 있었다.

시험을 치른 후 학생들의 답안지를 보면, 수업시간에 내가 말했던 미묘하게 다른 문화적 뉘앙스들은 그들의 기억에서 전부 사라져 있다.

살아남은 것은 오직 단정적인 말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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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게르하르트 리히터, <4900가지 색채>(4900 Farben) 2007, 루이뷔통 재단 미술관 컬렉션 ⓒ Gerhard Richter

이주은ㅣ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예전에 라디오 청취자를 대상으로 매주 예술가와 작품을 소개한 적 있었다. 작품을 이미지 없이 말로만 설명하기에는 늘 한계가 있었다. 삼원색을 가지고 그린 몬드리안의 <구성>이라면 빨강, 파랑, 노랑이 있다고 말해주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되겠지만, 페르메이르의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라면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말로 묘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말로 다 바꾸기 어렵다. 분홍이라고 묘사하는 봄꽃들도 섬세하게 따지자면 한가지 분홍이 아니다. 거의 흰색에 가까운 벚꽃 분홍에서부터 딸기우유 같은 복숭아꽃 분홍, 그리고 새색시 한복치마처럼 선명한 철쭉꽃의 분홍에 이르기까지, 연분홍과 진분홍 사이에 있는 수십가지 분홍은 이루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하루종일 우리가 쓰는 어휘 수는 의외로 많지 않다. 그 어휘들 중에 정보의 미묘한 차이를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어떤 사실을 이해시키려면 절대적인 방식으로 단순화해 강조해야 한다. 전달력 강한 말들은 흑과 백처럼 구획이 분명하다.

무언가를 구획해서 말하는 순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십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고, 예외적인 상황이라면 저렇다’ 하는 식으로 좀 더 신중하게 표현하면 중요하지 않은 정보, 혹은 너무 많은 정보로 간주되고 만다. 시험을 치른 후 학생들의 답안지를 보면, 수업시간에 내가 말했던 미묘하게 다른 문화적 뉘앙스들은 그들의 기억에서 전부 사라져 있다. 살아남은 것은 오직 단정적인 말투뿐이다.

사물을 단정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던 예술가가 있다. 독일 출신의 현대미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1932년생)이다. 그는 윤곽선을 흐릿하게 만들어 마치 초점이 어그러진 사진처럼 보이는 회색조의 그림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색채 견본집인 색상표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특별히 무언가를 나타내지 않더라도 여러 조각의 색채들이 질서 있게 어우러질 때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이다.

색이 주는 느낌을 이야기하기란 색의 차이만큼이나 미묘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색을 마음의 상태라고 보았다. 색을 보고 느끼는 우리의 감각적인 경험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어떤 색은 따스한 느낌을 주고 어떤 색은 시원한 느낌을 준다. 색이 직접 온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색이 우리의 감각에 작용하여 마음이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미술작품에서 색은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빛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에서 리히터의 <4900가지 색채>가 전시되고 있다. 작은 네모 속 4900개의 색들이 특별한 법칙에 따르지 않고 무작위로 25개씩 단위를 이루어 배열된 작품이다. 마치 컴퓨터의 픽셀 이미지를 확대해서 보는 것 같기도 한데, 직접 보면 그 많은 색들이 어느 특정한 하나의 색에도 치우치지 않고 개성을 발산하고 있는 점이 놀랍다. 채도가 낮은 색도 더 강한 색 속에 파묻히지 않고 평등하게 제각각 전체 아름다움에 기여하고 있다.

리히터는 색채 구성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손된 쾰른 대성당의 복원을 위해서 새 스테인드글라스로도 제작했다. 그 오래된 교회의 창문이 현대적인 감각의 색채로 바뀌었지만, 조각조각의 색들이 조화로운 빛으로 바뀌는 그 순간의 감동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리히터의 작품을 보니, 봄에 기쁨을 느끼는 것이 꽃 때문인지 다채로운 색 때문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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