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과학의 틀로 들여다본, 사회변화의 시작과 완성 [책과 삶]

배문규 기자 2021. 4. 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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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변화는 어떻게 촉발되는가
캐스 R 선스타인 지음·박세연 옮김
열린책들 | 472쪽 | 2만2000원

2012년 뉴욕시장 마이클 블룸버그는 공공장소에서 대용량(480㎖ 이상) 탄산음료 판매를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하다 거센 역풍을 맞았다. 성인 인구 절반이 넘는 비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온건한 정책이었지만, 뉴요커들은 외쳤다. ‘하지 말라고 하지 마!’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는 데 대한 거부감이 반대로 이어진 것이다. 사회문제는 종잡을 수 없다. 선한 의도로 시작된 정책이 시민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공고해 보이던 사회규범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경우도 있다.

<변화는 어떻게 촉발되는가>는 사회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행동과학의 틀로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책이다. 베스트셀러 <넛지(Nudge)>의 공저자로 유명한 법학자 캐스 R 선스타인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여러 공직을 거친 뒤 하버드 로스쿨 교수로 재직 중이다. 책은 일종의 ‘지침서’처럼 읽힌다. 선스타인은 ‘넛지 이론(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정책 설계에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제안한다.

2017년 11월 미국 할리우드에서 성폭력 피해자와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행진을 벌이고 있다. <변화는 어떻게 촉발되는가>는 현실 사회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AFP연합뉴스
2017년 전 세계 ‘미투 운동’처럼
누군가 규범에 도전해 목소리 내고
동조자가 늘어 임계점 넘어서면
들불처럼 번지는 세상의 변화들
성공·실패를 가르는 요인은 뭘까

책에선 시민의 힘으로 변화가 촉발되는 현상(1부)과 넛지의 활용과 한계(2부), 그리고 올바른 사회적 판단을 위해 경계해야 할 것들과 대안(3부)으로 사회 변화의 시작과 완성을 통찰한다. 때로 도덕적 당위보다 결과에 무게 중심을 두는 시선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시야를 넓히도록 하는 책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어린아이의 갑작스러운 폭로가 진실을 드러내듯이, 누군가 사회규범에 도전해 목소리를 내는 순간 변화는 들불처럼 번질 수 있다. 2017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미투’ 운동이 그랬다. 대다수가 차별에 반대하면서도 기존 규범 때문에 입을 다물지만, 누군가 규범에 도전하고 동조하는 사람이 늘어나 임계점을 넘어서면 변화는 찾아온다. 멀게는 프랑스혁명이 그랬고, 가깝게는 민권운동, 성소수자운동, 장애운동이 그러하다. 반대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과 같은 변화도 있다.

이러한 변화들을 공고하게 하는 것은 법이다. 책에선 입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법의 ‘표현적 기능’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성조기를 불태우는 행위를 애국심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지만, 그걸 법적으로 금지하는 건 다른 문제다. 오히려 국가의 강제를 반대하는 의미에서 성조기를 불태우는 경우가 늘어나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 문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최저임금이라는 것은 정부가 인간의 노동력이 최소한 시간당 얼마의 가치가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며, 이보다 낮은 임금은 인간 존엄성을 모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은 사회 취약계층의 실업률을 높일 위험이 있다. 전반적인 효과가 부정적인데도, 법의 ‘표현’ 때문에 인상안을 지지해야 하는가. “법적 표현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고상해 보인다고 해도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경우 실행에 옮겨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공공정책의 ‘투명성’도 일반적인 견해를 비켜간다. 공공정책 논의 결과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출력 투명성)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논의 과정(입력 투명성)까지 공개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가? 모두 공개하는 데 드는 비용에 비해 실제 편익은 적다는 것이다. 부패 상황에선 입력 투명성도 필요하다. 그러나 언제 투명성이 필요하고, 덜 필요한지 평가하는 것이 추상적 구호보다는 훨씬 더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책에선 행동경제학에 많이 나오는 ‘휴리스틱(정보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이용 가능한 정보를 활용한 의사 결정)’으로 여러 사례를 검토하는데 도덕적 휴리스틱에 대한 분석이 재밌다. ‘아시아 질병 문제’라는 사례를 보자. 이 질병이 퍼지면 600명이 사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대처하는 프로그램 A는 200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프로그램 B는 3분의 1의 확률로 600명의 목숨을 살리거나 3분의 2의 확률로 한 명도 살리지 못한다. 이 경우 사람들은 대부분 프로그램 A를 선택한다. 다시 프로그램 C에선 400명이 사망한다. 프로그램 D는 3분의 1의 확률로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며 3분의 2의 확률로 600명이 죽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D를 택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보면 프로그램 A와 C가, 프로그램 B와 D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현의 차이만으로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저자는 프레이밍이 도덕적 직관에 영향을 미친다는 데 주목한다. 당장 코로나19 상황에서 병상 배정과 백신 접종을 두고 노인과 젊은이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프레이밍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목숨이 오가는 사회적 결정이 달라질 수 있다.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의 주인공인 가수 식스토 로드리게스는 1970년대 초 미국에서 앨범 두 장을 발표하지만 전혀 성공하지 못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의 앨범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선 ‘대박’이 났었고, 영화에선 그 기묘한 대조를 그려낸다. 어떤 변화는 성공하고, 또 실패한다. 때로는 행운에 가깝다. 우연한 상호작용들이 어떻게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가능성을 탐구하도록 한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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