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나치의 실패한 '우수혈통' 실험.. "좋은 피·나쁜 피 따로 없다"

오남석 기자 2021. 4. 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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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37년 나치의 한 당국자가 ‘측경 양각기’로 한 아이의 머리 크기를 재고 있다. 나치는 혈통 조사와 신체적 특성 검사 등을 통해 이른바 ‘순수 아리안 혈통’을 찾았다. 휴머니스트 제공

-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 | 잉그리트 폰 욀하펜·팀 테이트 지음, 강경이 옮김 | 휴머니스트

나치, 우월한 게르만 늘리려

머리둘레·생식기형태 검사

순수혈통 판별해 강제입양

열등 분류된 아이들은 말살

‘우수한 피’로 입양됐던 저자

“뛰어나긴커녕 상처·수치심뿐

더 크지도 건강하지도 않아”

미국 등 인종혐오에 시사점

“이 이야기 곳곳에는 피가 흐른다.”

첫 문장부터 숨이 턱 막히는 책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국가주의와 인종주의가 ‘아이 납치’라는 극단적 광기로 이어졌음을 고발한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는 그런 책이다. 나치의 피해자인 저자 잉그리트 폰 욀하펜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앞서 일종의 경고문을 적어둔 것은 이 때문이리라. “나는 이것이 단순한 이야기인 척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쉬울 리가 없다. 그래도 당신이 읽는다면, 이 이야기를 살아내는 일도 쉽지 않았음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실제로 책을 읽는 내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한, 그래서 신음조차 내기 어려운 느낌이 이어졌다.

책에서 ‘피’는 중의적이다. 하나는 “전장에 쏟아진 젊은이들의 피, 유럽 전역의 마을과 도시의 배수로를 흐른 민간인들의 피, 절멸수용소에서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수백만 명의 피”와 같은 물리적인 피다. 다른 하나는 이념으로서의 피다. 세상에는 찾아내고 보존하고 늘려야 할 소중하고 신성한 ‘좋은 피’가 있고, 반대로 찾아내서 가차 없이 제거해야 할 ‘나쁜 피’가 있다는 나치 신념 속의 피다. 잉그리트의 삶이 그랬듯, 역사는 그릇된 신념이 수많은 무고한 이의 피를 부른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준다.

잉그리트의 삶을 뒤흔든 첫 번째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8월 유고슬라비아 첼예의 한 학교에서 일어났다. 나치에 저항하다 숨진 유격대원들의 친족 1262명이 이곳에 소집됐다. 그 안에 요한 마트코와 아내 헬레나, 8세 된 딸 타냐와 6세 아들 루드비그, 생후 9개월 된 딸 에리카도 있었다. 나치 친위대원들은 부모에게서 아이들을 떼 내 ‘건강 검진’을 했다. 나치의 용어가 대개 그렇듯, 이 역시 ‘건강 검진’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이들의 코 길이와 머리 둘레를 재고 입술과 치아, 엉덩이, 생식기 형태까지 검사했다. 그러고는 마치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듯 아이들을 4등급으로 분류했다. 불행하게도 에리카는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기차에 실려 독일로 떠난 430명에 속했다. 이는 채 돌도 지나지 않은 ‘유고슬라비아인 에리카 마트코’가 강제로 ‘독일인 잉그리트 폰 욀하펜’의 인생을 살게 되는 분기점이었다.

차갑기만 한 가족 속에 자랐음에도, 물리치료사가 돼 안정적으로 살아가던 잉그리트의 인생이 다시 한 번 흔들린 것은 1999년 가을. 그가 6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됐을 때였다. 독일 적십자사로부터 ‘친부모를 찾고 싶으냐’는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입양된 아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해 온 그는 이때부터 잃어버린 과거 찾기에 나섰다.

2007년까지 이어진 노력 끝에 밝혀낸 진실은 그야말로 말문이 막히게 한다. 잉그리트를 포함한 수많은 아이와 그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은 나치의 ‘레벤스보른(Lebensborn)’ 프로젝트였다. 레벤스보른은 ‘생명의 샘’을 뜻하는 고대 게르만어로, 나치의 2인자이자 친위대장이었던 하인리히 힘러가 총괄 지휘한 일종의 인종 실험이었다. 그 이념적 토대는 피의 순수성을 이유로 한 종족이 다른 종족보다 우월하다는 위험한 생각, 즉 우생학이었다.

우생학은 독일인이 아리아인 초인 종족의 진정한 후손이며 다시 세상을 지배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나치의 비논리적인 신념의 토대가 됐고, 이는 유대인과 장애인, 집시 등 그들이 ‘열등 인종’으로 보는 사람들에 대한 ‘최종 해결(몰살)’로 이어졌다. 홀로코스트와 레벤스보른 프로젝트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순수한 아리안 혈통을 늘리기 위해 친위대원들에게 혼외관계를 통해서라도 아이를 많이 낳을 것을 명령하는 한편, 아이를 낳지 못하는 ‘순수 혈통’ 독일인들을 위한 별도 계획을 추진했다. 점령지에서 이른바 ‘민족독일인(Volksdeutsche)’, 즉 순수한 아리안 혈통으로 추정되는 외국 아이를 찾아내 독일 가정에 강제 입양시킨 것이다. 나치가 ‘독일화’라고 부른 강제 입양 사실을 확인한 잉그리트는 치밀어오는 분노에 몸서리쳤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쓰면서 나는 나치 철학의 끔찍한 본질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심했다. ‘터무니없는’이나 ‘기괴한’ 같은 단어를 끌어다 쓰기는 쉽다. 하지만 그런 상투적 표현을 넘어 그 끔찍함을 어떻게 진정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말로는 그 끔찍함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치의 ‘인간 개종’ 프로젝트는 성공했는가. 잉그리트의 삶은 이 질문에 분명히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장애인을 절멸 대상으로 봤던 나치와 달리 그는 장애아를 돌보는 물리치료사로 평생을 살았다. 순수 아리안 혈통을 퍼뜨린다는 나치의 목표와 달리 그는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았다. 60여 년 만에 찾은 친가족보다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동생(입양모의 아들)에게 더 애착을 느낀다. 다른 레벤스보른 피해자들도 더 키가 크고, 더 강하고, 더 건강하기는커녕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고, 오히려 깊은 정서적 상처와 수치심이라는 두드러진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피’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의 걱정은 나치의 그늘이 드리운 듯한 현재의 세계를 향한다. 정도 차는 있지만 아직도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왜곡된 신념이 사라지지 않았고, 민족이나 종교 등에 따른 충돌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저자가 인용한 올더스 헉슬리의 경고는 장벽을 높이 세우고 인종 혐오에 찌든 지금의 세계인들을 향한 메시지로 들린다. “역사의 교훈은 우리가 이제껏 역사에서 배운 것이 없다는 것이다.” 272쪽, 1만6000원.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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