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출간 한승원 "이야기들은 내 삶을 지배하고 나를 구제했다"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어머니는 아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마다 자신이 꾸었던 태몽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했고, 그는 이를 “여느 사람과는 다른 특출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나 신탁처럼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한승원(82)이 소설가로 살아온 일생을 정리한 자서전 『산돌 키우기』(문학동네)를 펴냈다. “나의 마지막 진술이 될지도 모”른다며 어머니의 태몽 이야기부터 고향 장흥에서 산돌 키우듯 문학의 꿈을 지키고 있는 요즘 모습까지 자신의 삶과 문학을 옹골차게 담았다.
어릴 시절, 한승원은 할아버지를 통해 괴짜 선비 이야기나 간사한 여우 이야기, 여의주를 삼킨 소년 등 이야기의 세계로 인도됐다. 그 세계에는 지혜와 통찰뿐만 아니라 인간 본원의 삶과 모럴(윤리)이 담겨 있었다. 그건 ‘이야기의 힘’이었다.
“모든 이야기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부터 구제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윤리(모럴)를 내포하고 있는 모든 이야기는 신통한 힘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들은 평생 동안 내 삶을 지배하고 나를 구제했다.”(50쪽)
할아버지가 ‘이야기의 하늘’을 보여주고 어머니 역시 그를 극진하게 애정한 것과 달리 아버지는 현실적이어서 장남을 위해 차남인 자신이 집에서 농사를 하길 바랐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하늘을 가르치고 싶어 하셨는데, 아버지는 나에게 땅을 가르치고 땅을 사서 물려주려 하셨다. 할아버지는 꿈같은 이상적인 삶을 사신 분이었고, 아버지는 현실적인 삶을 사신 분이었다.”(33쪽)
“촌놈이 왜 서울 것들 흉내를 내는 거야.” 서울의 어느 술자리에서 당시 『월간문학』 편집자였던 이문구가 등단 뒤 시류를 좇아 군사독재 정권의 엄혹한 통치를 풍자한 작품을 즐겨 쓰던 그에게 쓴소리를 했다. “너한테는 바다가 있지 않니? 니 「목선」 같은 소설을 써라. 다른 친구들은 바다 이야기를 쓰고 싶어도 몰라서 못 쓴다.”(358쪽)
그는 이후 소설집 『안개바다』, 『폐촌』, 『포구의 달』 등과 장편 『해일』, 『해산 가는 길』, 『멍텅구리배』 등 다채로운 바다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창작했고, 특히 1980년 교직을 그만두고 상경해 전업 작가가 돼선 『불의 딸』, 『아제아제 바라아제』, 『동학제』, 『원효』, 『추사』, 『다산』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쏟아냈다.
1997년 고향인 전남 장흥으로 귀향한 후에도 해산토굴에 스스로를 가두고 형벌처럼 커다란 바위를 들고 올라가기를 반복하는 그리스신화의 코린토스 왕 시시포스처럼 글을 쓰고 또 쓰고 있다.
책에는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한 소설가인 딸 한강 이야기도 조금 담겨 있다. 1970년 늦가을, 광주의 기찻길 옆 열한 평의 대지 위에 지붕이 낮고 작은 시멘트 블록 움막집에서 딸 한강을 낳았다.
“아기는 얼굴이 예쁘장한데, 피부가 약간 가무잡잡했고 이국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마가 여느 아이와 다르게 내밀기 때문에 눈이 약간 들어가는 느낌이었고, 속눈썹이 유난히 길면서 위쪽으로 휘어진 듯싶기 때문에 눈동자가 하늘 호수처럼 유난히 길면서 위쪽으로 휘어진 듯싶기 때문에 눈동자가 하늘 호수처럼 깊고 그윽하고 맑아 보였다.”(359쪽)
한강은 어린 시절 공상을 즐기는 아이였다고, 그는 기억했다. 개망초꽃이 꿈을 노래하던 6월 중순 해질녘, 방안에서 줄곧 글을 쓰고 있던 한승원은 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불길한 생각에 이곳저곳 찾다가 어두운 방에서 혼자 가만히 누워 있는 딸을 발견했다. “너 거기서 뭐하고 있니?” 가슴을 쓸어내린 한승원이 묻자 어린 한강은 발딱 일어나 앉으며 “공상이요!”라고 대답한 뒤 되물었다. “왜요, 공상하면 안 돼요?”(383쪽)
“이야기를 통해 삶의 빛을 얻고, 순전히 이야기의 힘으로 살아왔음을 증명해주는” 한승원의 자서전 『산돌 키우기』는 시 같기도 하고 에세이, 콩트 같기도 하지만 그 모두를 융합한 새로운 형식 같기도 하다. 그는 “추사 김정희가 젊을 때에는 해서체와 예서체, 초서체, 전서체 등 글씨체를 구별해 글을 썼지만 일흔이 넘어서면 봉원사의 판각 글씨처럼 특정 글씨체를 초월해 총체적으로 융합시켜 삶과 세상을 보고 표현하듯이 종합적인 글씨를 썼다”며 “나의 자서전 역시 시이면서 에세이면서도 콩트이면서 그런 것들이 한데 어울려진 새로운 문체가 되도록 시도했다”고 말했다.
“고백하자면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어떤 경우에도 문학을 삶 앞에 두지 않겠다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반짝이는 석영 같은 이 페이지들 사이를 서성이고 미끄러지며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얼마나 척박한 흙을 밀고 그가 기어이 꽃피었는지. 그걸 가능하게 한 글쓰기가 그의 종교였음을. 그토록 작고 부드러운 이해의 순간이 나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501쪽)
“살아 있는 한 쓸 것이고, 쓰고 있는 한 살아 있을 것”이라며 아직도 해산토굴 앞에서 ‘산돌’을 키우고 있다는 한승원. 스스로를 구원했고 아직도 키우고 있다는 그 산돌은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얼마만큼 컸을까, 한국문학의 대지를 얼마나 밝혀 왔을까. 산벚꽃은 바람 속에서 하늘거리고, 봄구름은 태양을 향해 걷고 있었다.(2021.4.9)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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