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선-구경꾼' 은유로 다시 보는 서양사상사

한겨레 2021. 4. 9.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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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이후 난파 부르는 '항해 충동' 옹호 시작
디지털 시대 도래 '구경꾼-난파선' 구분 무의미해져

난파선과 구경꾼: 항해로서의 삶, 난파로서의 이론
한스 블루멘베르크 지음, 조형준 옮김/새물결·2만3000원

‘10년 표류 지역주택조합 1년 만에 회생’, ‘(프로농구팀) 전자랜드의 마지막 항해, 유종의 미 거둘까?’, ‘좌초된 민주유공자 예우법 또 발의’, ‘갈 길 먼 최저임금 심의 곳곳에 암초’, ‘식량까지도 다 버리는 것이 난파 직전의 배, 구조조정 기업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 ‘난파선 된 부동산 컨트롤 타워.’ 최근 뉴스를 잠시만 검색해도 볼 수 있는 항해, 표류, 좌초, 암초, 난파, 난파선의 은유들이다.

“인간은 단단한 대지 위에서 삶을 영위하고 제도를 수립한다. 하지만 자기의 현존재의 움직임 전체를 파악하려고 할 때는 위험천만한 항해라는 은유법을 선호한다. 후일 하늘이 정복되기 전까지는 바다의 현실이 가장 안전하지 않은 존재였다. 인간은 대지에 거주하는 존재이면서도 세계 안에서의 자기의 전반적 조건을 오히려 항해의 이미지로 표상하기를 좋아한다.”

‘은유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독일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항해와 난파, ‘난파선-구경꾼’이라는 은유를 철학적‧개념사적으로 살핀다. “폭풍우 속의 바람이 파도를 뒤집어엎을 때, 해안에 서서 남이 난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로마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인간이 자기가 있는 장소의 안전함을 만끽하는 것을 말했다. 이러한 난파선과 구경꾼의 관계는 현실과 철학·이론의 관계와 비슷하다.

고대의 철학자들은 철학 연구를 통하여 또한 철학 연구를 위하여 세계 바깥에 구경꾼으로 자리 잡는다. 난파를 부르는 항해 충동을 헛되고 오만한 것으로 여겼다. 근대 계몽주의 이후 난파는 “바람이 완전히 잦아들어 세계의 모든 교역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 되었다. 그전까지 철학에서 냉대받은 정념에 대한 옹호가 시작됐다.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퐁트넬이 <죽은 자들과의 대화>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말한다.

“항해자들은 항해가 불가능한 잔잔한 바다를 극도로 두려워한다고 하지 않소? 또 그러기에 폭풍이 일어도 좋으니 바람이 일기를 바란다고들 하오. 사람에게 정념은 모든 것에 동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하는 바람과 같은 것이오.”

난파 모습을 지켜보는 구경꾼을 윤리 측면에서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볼테르는 루크레티우스의 ‘난파선-구경꾼’ 은유에 대해, 난파당하는 배를 구경하기 위해 달려가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인 호기심 때문이지만, 그 호기심 강한 무리 중에 난파당한 사람을 구하려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고 주장한다.

구경꾼은 센세이셔널한 사건의 매력에 어찌할 수 없이 빠져든다. 사람들이 불구경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교통사고 현장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보고 가려하듯. 그런데 갈리아니 신부는 <철학사전>에 볼테르가 쓴 ‘호기심’ 항목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관객이 안전하게 앉아 있을수록 또 관람하는 그가 관람하는 위험이 보다 클수록 그만큼 더 연극의 볼거리는 열기를 띤다.” 구경꾼이 바다 위 난파에 매혹당하는 것은 그저 그가 단단한 대지 위에 서 있기 때문이라는 것. 사람들은 남의 불행을 보고 ‘나는 지금 안전하구나’ 생각한다.

19세기에 들어와 ‘난파선-구경꾼’ 은유는 극복 불가능한 딜레마에 점령당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거리를 두는 구경꾼으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난파 상황에 적극 가담할 것이냐는 딜레마다. 역사가 부르크하르트가 <혁명의 시대의 역사 서문>(1867)에서 말한다. 역사가들은 “튼튼하다고는 말하지 못할 배에 탄 채 혁명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한 무수한 파랑 위를 표류하고 있다. 우리 자신이 그러한 파도이다. 객관적 인식이 어려워진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가가 더 이상 시대를 전체로 조망할 수 있는 관점을 얻을 수 없다고 본다. 역사가가 거리를 둔 구경꾼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견고한 관점은 없다는 것. 그럼에도 역사가가 던지는 물음은 의미 있다. “나중에 ‘어떻게 그랬지?’ 하고 추측해보려고 해보았자 모두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지금 우리가 이 바다의 어느 파도 위를 표류 중인지를 묻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얼마든지 허용되어야 할 호기심이지만 말이다.”

<난파선과 구경꾼>의 저자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윌리엄 터너의 그림 ‘미노타우로스 호의 난파’(1810)에서 난파가 ‘낭만주의적 죽음에의 동경’으로 표현됐다고 본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현실 속 파국, 즉 난파가 구경꾼 앞에서 상연되는 교훈극이 되기도 한다. 헤르더가 <인간성의 증진을 위한 서한집>(1792)의 17번째 서한에서 독일이 이웃 국가들의 혁명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 혁명을 반면교사(反面敎師) 교훈극처럼 구경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프랑스혁명을 마치 낯선 공해에서 일어난 난파처럼 안전한 해변 높은 곳에서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악령이 우리를 바다 속으로 내던지는 것과 같은 짓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우리는 폐회로티브이(CCTV)로 늘 구경당하고 소셜미디어(SNS)로 나를 남들에게 구경시켜주며 구경당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미얀마 군부의 시민 학살과 아시아계 미국인이 거리에서 폭행당하는 장면을 뉴스에서 구경한다. 생중계되는 이라크 전쟁을 구경했고, 지구온난화로 살 곳 잃은 북극곰을 구경하며, 세월호가 가라앉는 모습을 구경해야 했다. 난파는 각자 손에 쥔 스마트 기기라는 ‘극장 안’에서 일어난다. 난파를 지켜보던 “해안에서 극장 안으로 옮겨감에 따라 구경꾼은 도덕적 차원을 빼앗긴다.” 나는 구경꾼인가 난파선인가?

문학, 역사, 미디어학 등 여러 분야에 이론적 자극이 될 만한 책이다. 읽고 난 뒤 떠오른 영화는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타인의 삶>(2006년)이다. 번역된 블루멘베르크의 논저는 이 책 <난파선과 구경꾼>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들>(양태종 옮김,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이다. <현대 독일 미학>(이학사)에 전예완이 쓴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역사현상학적 미학’이 실려 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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