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햇살, 달빛이 추억이 된 세상..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다고?

최재봉 2021. 4. 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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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테마 소설집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
김기창 지음/민음사·1만4000원

‘기후변화가 아니라 기후위기’라 해야 할 정도로 사태는 심각하다. 인류를 포함한 종의 대멸종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사회 각 분야에서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한 궁리도 활발하다.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에 대응하려는 문학쪽 실천을 대표하는 것이 ‘클라이파이’(cli-fi) 곧 기후 소설이라 하겠다. 클라이파이에 해당하는 작품 출간이 제법 활발한 영미권과 달리 한국문학에서는 이제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김기창의 테마 소설집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은 그런 점에서 반가운 시도다.

책의 제목은 물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왔는데, 수록된 단편 열 편 중에는 표제작에 해당하는 작품이 따로 없다. 열 편 모두가 책 제목에 담긴 주제를 다룬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그에 부합하는 한 작품을 고르라면 환경운동가 커플의 사랑을 다룬 ‘1순위의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우선은 ‘돔시티 3부작’을 살펴보자.

책 맨 앞에 차례로 실린 ‘하이 피버 프로젝트’ ‘갈매기 그리고 유령과 함께한 하루’ ‘개와 고양이에 관한 진실’ 세 작품을 편의상 돔시티 3부작이라 부르기로 하자. 돔시티란 한정된 구역에 돔구장처럼 벽을 쌓고 지붕을 씌워 외부 세계와 단절시킨 공간을 가리킨다. “에어컨이자 공기정화기였고 습도 조절 장치”를 겸하기도 한 돔시티는 살인적인 더위로부터 거주민들을 보호하는 울타리 구실을 한다. 문제는 그것이 “모두의 울타리는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수용 인원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울타리 바깥으로 쫓겨나야 했다. 차별과 배제의 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세 연작은 돔시티의 폐쇄성에 균열을 내려는 추방자, 돔시티 밖으로 추방된 연인 때문에 죄책감과 회한에 시달리는 남자, 어떤 이유에서든 양쪽을 오가는 이들을 상대로 뇌물을 받아 챙기는 민병대원 등을 등장시켜 이 ‘기후 안전 도시’의 허위와 폭력성을 고발한다.

2014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 작가인 김기창의 소설집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은 한국문학에서 본격적인 클라이파이의 시대를 연 작품으로 평가할 만하다. 사진은 지난해 4월22일 지구의 날을 맞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 활동가들이 코로나19 사태의 근본 원인은 생태계 파괴와 기후변화라며 환경문제에 범국민적 관심을 촉구하는 행위극을 하는 모습.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정말 멍청해.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다고? 정말?”(‘하이 피버 프로젝트’)

“나는 동조자였나? 방관자였나? 그저 나밖에 모르는 겁쟁이에 불과했나?”(‘갈매기 그리고 유령과 함께한 하루’)

‘하이 피버…’의 주인공 소피가 매일 밤 잠들기 전 되뇌는 자문은 기후변화가 돔시티라는 재앙을 불러오도록 방치한 이들의 무지와 무기력을 겨냥한다. 물론 소피 자신이라고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갈매기…’에서 주인공 요셉의 자문과 자책은 일차적으로는 돔시티 바깥의 연인을 향한 그리움과 관련이 있지만, 이 역시 돔시티로 상징되는 기후위기를 방치한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읽을 수 있다. 소피나 요셉의 것과 비슷한 의문과 자책을 ‘1순위의 세계’에서도 만날 수 있다.

“어느새 이렇게 된 것일까? 정말 돌이킬 수 있을까?”(‘1순위의 세계’)

이 작품의 남자주인공 우석이 스스로에게 하는 이런 질문은 이중적이다. “필터를 통과하지 못한 불투명한 것들의 세계. 잿빛 하늘. 쇳빛 강물. 텁텁한 공기”로 표현되는 파괴된 환경이 한편에 있다면, 동료 환경운동가 출신 아내 희연과 결혼생활에 밀어닥친 위기가 다른 한편에 있다. 이 커플에게 환경 파괴와 결혼생활의 파탄은 동시적으로 경험된다. 같은 이치로, 부부의 좋았던 시절 기억은 좋은 날씨와 연관된다. “그때마다 필요한 바람, 온도, 습도, 햇살, 달빛이 정확히 거기 있었지. 그리고 당신이 항상 곁에 있었고. 어느 것이 나한테 더 중요했는지 생각해 보면, 나는 당신이야.”(‘1순위의 세계’) 희연과 우석은 중금속이 검출된 학교 운동장의 우레탄 트랙을 교체하도록 하고,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제동을 거는 한편 풍력발전소 건설 효과를 홍보하는 등의 활동에 매진하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도 하지만, 기후위기를 돌이키기 쉽지 않은 것처럼 금이 간 부부의 관계를 회복시킬 가능성 역시 요원하다.

‘소년만 알고 있다’와 ‘약속의 땅’은 각각 발리섬 남단 산호초의 백화(白化: 산호의 죽음) 현상과 해빙(解氷)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북극곰 가족의 위기를 다룬다. 기후위기 테마 소설집에 부합하는 설정인 셈인데, 주제의식이 선명한 만큼 소설적으로 충분히 육화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자신도 모르게 이곳에 사는 모든 것들을 조금씩 그렇지만 확실하게 사라지게 만드는 버튼을 눌렀고, 그래서 바다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으며, 그 구멍 안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소년만 알고 있다’) 하는 소년의 불안감, 북극곰과 이누이트 원주민 “사이를 지탱하던 질서와 순리의 밑바탕이 녹아내리고 있다”(‘약속의 땅’)는 북극권 동물과 인간의 위기감이 좀 더 핍진하고 절박하게 묘사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폭염에 시달리는 이를 위해 “지구에 커튼을 쳐” 주겠노라는 발상이 깜찍한 ‘지구에 커튼을 쳐 줄게’, 위협적인 폭우와 열대야에 차례로 시달리는 주인공의 도피와 절망을 환상적 필치로 그린 ‘접는 나날’, 해수면 상승에 따른 고지대의 재개발에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저항하는 남녀를 등장시킨 ‘굴과 탑’에서는 기후변화가 장식적 구실 이상을 하는 것 같지 않다.

‘천국의 초저녁’은 콩트적 구도 속에 인도양의 작은 섬나라 몰디브를 위협하는 해수면 상승이 초래한 딜레마적 상황을 다룬다. 몰디브가 바다 아래 잠기기 전에 가서 보고 동시에 방파제 축조를 위한 기금 마련도 돕자는 남편 경민, 지구 온도를 올리고 산호를 위협하는 여행을 자제하는 게 진정 몰디브를 위하는 길이라는 아내 은주의 견해가 팽팽히 맞선다. “지구온난화 따위를 걱정하지 않으며 천국의 초저녁을 볼 수 있는 (…) 방법”은 과연 있을까. 소설집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은, 비록 한계가 없지 않은 대로, 한국문학에서 본격적인 클라이파이의 시대를 연 작품으로 평가할 만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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