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에 새겨진 그리스의 흔적을 찾아서

한겨레 2021. 4. 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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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축제의 땅, 김헌의 그리스 기행]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 세계를 에게해 너머로 넓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200여년간 융합된 문명 화려하게 꽃피워

[책&생각] 신화와 축제의 땅, 김헌의 그리스 기행

⑱이집트로 가는 여정

이집트 쿠푸 왕의 피라미드. 김헌 제공

운이 좋았다. 2020년 1월에 이집트, 튀니지, 몰타를 다녀왔는데 얼마 후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여행길이 막혔으니 말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곳을 가보지 못하거나, 현지에서 발목이 잡혀 곤욕을 치를 뻔했다. 다행히 일정대로 답사를 마치고 무사히 귀국했다. 2019년에 아테네에서 출발하며 ‘에게해의 문명’을 둘러보았는데(이 내용은 지난 열일곱번의 연재 글에 담았다), 이번 답사는 그 후속편이었다. 에게해를 넘어 지중해로 나아간 것이다.

에게해는 지금의 그리스와 터키, 그리고 남쪽 크레타섬 안쪽의 바다를 가리킨다.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힘을 합쳐 페르시아의 두차례 침략을 막아내고 ‘고전기 시대’(Classical Period)라 불리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루어나갈 때, 지리적 배경이 된 곳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라는 공동의 적을 몰아내자,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곧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놓고 서로 적이 되었다. 마침내 둘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27년 동안 맞붙었고, 승자도 패자도 모두 쇠락하는 길로 가고 말았다.

한편 북쪽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나타나면서 그리스 세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는 그리스를 통합하여 코린토스 동맹을 재건한 후,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면서 그리스 세계를 에게해 너머로 확장했다. 육상으로는 소아시아 깊숙이 진격하여 인더스강까지 이르렀고, 해상으로는 에게해를 넘어 지중해 세계로 나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가 당시 페르시아 치하에 있던 이집트를 정복하면서부터 그리스는 본격적으로 지중해의 동쪽을 지배하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리스는 시칠리아섬의 동부에 여러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프랑스 남부 해안과 스페인의 동쪽, 그리고 아프리카 북부로 진출하면서 지중해를 누비고 다녔지만, 알렉산드로스 이전까지 그들의 문명은 에게해 중심이었다.

에게해를 건너 페르시아 땅에 발을 디딘 알렉산드로스는 그라니코스 전투를 시작으로 승승장구하며 지금의 터키 서부 해안을 따라 내려가다가 마침내 이집트에 이르렀다. 특히 나일강 하류의 비옥한 삼각주 지대 서쪽 끝은 그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는 자신의 조국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를 출발해서 그곳까지 초승달 모양의 땅을 정복해나갔다. 지중해 동쪽을 장악하자, 그곳이 새로운 제국의 중심지로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그곳에 자기 이름을 붙여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다. 그리고 그곳을 제2의 아테네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페르시아 중심부를 향해 돌진하면서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하지 못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시신이 된 상태였다.

알렉산드로스 무덤을 최고의 신전으로

인천에서 출발하여 쾰른을 경유하고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을 넘겼다. 직전의 그리스 답사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면서 이집트로 가는 여정은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을 내내 떠오르게 했다. 내가 머문 호텔은 우리의 현대사와도 관련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일제로부터 독립이 국제적으로 합의된 카이로 회담이 열린 곳이었기 때문이다. 어둠이 짙게 깔렸는데도 쿠푸 왕의 피라미드 실루엣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집트 하면 뭐니 뭐니 해도 피라미드 아닌가.

피라미드를 비롯한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둘러보는 것도 의미 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부터 그 안에 새겨진 그리스의 흔적을 보는 것은 더욱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집트는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를 자처하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부터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에 이르기까지 약 275년 동안 그리스인이 지배하던 왕국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혈통적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자, 그를 수행하던 장군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이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땅을 나눠서 차지하고도 더 많이 갖겠다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 가운데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리아가 있는 이집트를 차지했다.

예언자 아리스탄드로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이 머무는 곳은 영원히 강성하리라’는 말을 던지자,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마케도니아로 후송 중인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빼돌려 이집트의 멤피스로 가져왔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 알렉산드로스의 무덤을 짓기 시작했고, 자신의 형제였던 메넬라오스를 초대 사제로 임명하여 알렉산드로스를 위한 제의를 집행하도록 했다. 그 제의는 죽은 인간이 아니라 불멸의 신을 위한 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마침내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알렉산드리아로 옮겨 놓고, 알렉산드로스의 무덤을 최고의 신전으로 격상했다. 당연히 그곳의 사제는 최고의 권위를 부여받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살아 있을 때도 신으로 추앙받길 원했으며, 자신을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천명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은 이를 뒷받침할 알렉산드로스의 태몽을 전해준다. 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을 배에 맞았다. 그 벼락에서 튄 불꽃은 그녀의 몸으로부터 전 세계로 번져나갔다. 벼락이란 제우스를 상징하니, 그녀가 잉태한 아이의 아버지는 제우스였음을 의미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암몬 신전에 들러 자신이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왕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뜻을 받들어 그를 신격화하는 동시에 자신들도 그 반열에 함께 섰다. 알렉산드로스를 위한 제의가 최고의 국가적인 행사로서 엄중하게 거행되었던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권을 종교적으로 강화하고 대외적으로 후계자의 위치를 선언하기 위한 것이었다.

새로 건설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내부 모습. 김헌 제공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서구 문명의 산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알렉산드로스의 적통임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도서관도 건설했다. 살아생전 알렉산드로스는 알렉산드리아가 제국의 정치와 경제는 물론 문화의 중심지가 되길 원했고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을 세우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 계획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 의해 실행되었다. 이를 위해 아테네로부터 데메트리오스가 초빙되었는데,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 세운 학원인 리케이온에 소속된 인물이었다. 이 또한 알렉산드로스의 정신을 계승했음을 과시하는 하나의 징표였다.

이 도서관은 박물관의 기능도 했으며, ‘무세이온’(Mouseion)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박물관의 영어 단어 ‘뮤지엄’(Museum)이 여기에서 나왔다. 이는 음악과 시가의 여신인 아홉 ‘무사’(Mousa)들을 위한 신전이라는 뜻이다. 박물관, 도서관이 신전이라? 무사 여신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와 제우스의 딸이다. 제우스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를 제압하고 영원한 권력을 획득했으니, 둘의 결합에서 태어난 무사 여신들은 시간의 흐름에도 퇴색하지 않는 영원한 기억의 힘을 유전적으로 가진 셈이다. 따라서 도서관의 책이나 박물관의 유물은 한 공동체의 지식과 역사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것들이니 무사 여신들의 가호를 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도서관, 박물관은 무사 여신의 신전이며, 그곳에서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는 것은 무사 여신을 위한 종교적 제의나 마찬가지였다.

초대 도서관장은 제노도토스였다. 그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지금에 가까운 형태로 편집한 탁월한 문헌학자였다. 그 밖에도 당대의 최고 지식인들이 이곳에 모여 수많은 책을 모으고 정리하고 연구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피어난 그리스 문명이 바로 이곳에서 수백년 동안 집대성되고 심화하였으며, 헬레니즘 시대의 탁월한 문화적 성취로 이어져 서구 문명의 튼튼한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하면서 도서관의 일부가 파괴되었고, 그 이후에도 내전과 외침을 겪더니 마침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2002년에 이집트 정부와 유네스코가 함께 세운 새로운 도서관이 과거의 영광을 조금이나마 재현하고 있다. 이집트의 매력은 다양한 문명의 유산과 역사를 품고 있다는 것인데, 그리스의 흔적은 이집트가 서구 역사의 바깥에 있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김헌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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