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대로 죽는다'라는 말 앞의 일상

한겨레 2021. 4. 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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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를 처음 만난 곳은 국립중앙박물관 앞 광장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삶이 과연 일상적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떠올랐을 때, 어머니가 낯선 절망감이나 막연한 절박함에 매몰되지 않고 살아왔던 대로의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한 것은 그가 평생 지녔던 '사랑'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산 대로 죽는다'라는 말 앞에서 일상을 가다듬고 내 삶의 방식을 단단히 굳히는 것이 우선이라고 다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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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책이 내게로 왔다

엄마의 마지막 말들
박희병 지음/창비(2020)

저자를 처음 만난 곳은 국립중앙박물관 앞 광장이었다. 으레 카페나 사무실에서 ‘미팅’ 하던 것을 생각하면 그날 만남의 장소는 퍽 낯설었다. 당시 장소 제안을 들은 나는 그저 코로나가 만연한 상황에서 저자가 서로의 안전을 염려해 내놓은 대안쯤이라고 생각했다. 그 짐작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공간이 그냥 그렇게 선택된 곳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책의 편집이 다 끝난 후에야 생각하게 되었다. 박물관 앞은 저자의 어머니가 생의 마지막에 다니셨던, 그리고 저자가 지금도 자주 다니는 산책로였다. 바람이 많이 불던 광장 어딘가에서 저자는 여전히 어머니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장소가 저자를 무너뜨리는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만사를 제쳐놓고 정신없이 글을 쓰다가, 다 마치고 나서는 오히려 글을 완전히 덮어두고 다시 하던 연구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의 부재로부터 온 비일상의 시간을 일상 속에서 단단하게 받아내고 있는 듯했다. 그 단단함의 일부는 분명 그의 어머니에게서 온 것일 터였다.

<엄마의 마지막 말들>은 투병 당시 저자의 어머니가 발화한 짧은 말에 저자의 해석과 생각이 덧붙는 식으로 되어 있다. 저자의 어머니는 인지저하증(소위 ‘치매’) 환자로 생의 마지막 일년을 보냈다. 세간에서는 인지저하증 환자의 발화가 모두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나오며, 그래서 그 존재 자체가 ‘비일상적’이라고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엄마의 마지막 말들’은 그 발화만 놓고 보면 전혀 특별할 것이 없어서, 몇몇 순간을 제외하고는 그가 그런 병을 앓고 있다고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저자는 어머니의 존엄이 투병과 소멸의 시간 속에서도 전혀 훼손되지 않고 온전히 남아 있음을 이러한 일상성에서 발견한다.

저자의 어머니는 일상을 채우는 태도를 통해 그의 존엄을 주체적으로 드러낸다. 저자는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평생 늘 해오신 말들을 했고 늘 해오신 걱정들을 했으며 늘 눈을 주곤 했던 대상들에 눈을 주셨다”라고 회고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삶이 과연 일상적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떠올랐을 때, 어머니가 낯선 절망감이나 막연한 절박함에 매몰되지 않고 살아왔던 대로의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한 것은 그가 평생 지녔던 ‘사랑’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죽음과 투병의 과정에서도 저자의 어머니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 곁에 있는 이들을 향한 사랑을 끊임없이 드러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숭고한 가치가 가진 힘보다도, 사랑을 삶의 방식으로 삼아 살아온 평생의 시간이 가진 힘 때문에 가능했던 듯하다. 저자는 산 대로 죽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지켜봤노라고 고백한다.

이하늘 창비 편집자.

죽음이 당장 눈앞에 온 것처럼까지야 아니라도 일상이 자꾸 위협받는 때다. 혹 다가올지도 모를 비일상적 상황에 대한 두려움은 일상의 물리적 조건을 먼저 들여다보게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평생을 관통하는 존재 방식으로 자리할 수는 없다. 저자는 어머니의 마지막을 통해 “평생 살아온 과정과 방식이 죽어가는 과정과 방식을 결정”함을 깨달았다고 했다. ‘산 대로 죽는다’라는 말 앞에서 일상을 가다듬고 내 삶의 방식을 단단히 굳히는 것이 우선이라고 다시 깨닫는다. 설익은 삶에 이 원고가 다가온 것은 아마 내가 그렇게 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하늘 창비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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