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따라 그린 '어린이 그림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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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묘사가 꼼꼼한 영화나 드라마를 푹 빠져서 보다가도 '어린이가 그린 그림'이 등장하면 김이 새곤 한다.
주로 어린이의 순수함을 강조하는 클리셰라는 점도 그렇지만, 그 그림이 너무 가짜 같아서 실망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린이가 그린 그림 같다'고 소개되는 그림책에서조차 미숙함만이 어린이 그림의 특징인 양 강조하는 것을 보면 씁쓸해진다.
'어린이가 그린 그림 같다'는 말을 결코 쉽게 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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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야
미로코 마치코 글·그림, 김소연 옮김/길벗어린이(2017)
세부 묘사가 꼼꼼한 영화나 드라마를 푹 빠져서 보다가도 ‘어린이가 그린 그림’이 등장하면 김이 새곤 한다. 주로 어린이의 순수함을 강조하는 클리셰라는 점도 그렇지만, 그 그림이 너무 가짜 같아서 실망스럽기 때문이다. 화면 속 ‘어린이 그림’들은 대개 전형적이다. 선이 삐뚤삐뚤하거나 비례가 맞지 않고 묘사도 단조롭다. 그림의 내용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표현 방법이 너무 뻔하다. 누가 봐도 어른이 그린 그림이다.
실제 어린이 그림은 그렇게 엉성하지 않다. 자발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어린이를 본 적이 있다면 어린이가 자기 작품에 얼마나 진지한지 알 것이다. 어떤 부분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또 어떤 부분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략된다. 과감할 때도 있고 세심할 때도 있다. 때로는 원근법이 아니라 마음을 따라서 크게 또는 작게 그린다. 어린이는 보이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그린다. 기술적으로 서툴다고 해서 그림을 못 그리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어린이가 그린 그림 같다’고 소개되는 그림책에서조차 미숙함만이 어린이 그림의 특징인 양 강조하는 것을 보면 씁쓸해진다.
미로코 마치코의 그림책을 볼 때면 자연스럽게 ‘어린이 그림’이 떠오른다. 자기 눈에 보이는 것,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느라 기법 같은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 같다. <늑대가 나는 날>(한림출판사), <짐승의 냄새가 난다>(보림)의 그림들은 힘차고 날카롭고 조금 불친절하다. <내 이불은 바다야>(길벗어린이), <내 고양이는 말이야>(길벗스쿨)는 다정하고 유머가 넘치며 사랑스럽다. 거친 선도 제멋대로인 채색도 재미있는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거기 담긴 뜻을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즐겁다.
<흙이야>는 흙 알갱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책이다. 황금빛 태양과 인사하면서 등장하는 흙은 맨 처음 흙이 생겨날 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책장을 넘기면 ‘축축한 뿌리와 함께 있는 기분 좋은 흙’ ‘지렁이 때문에 간지러운 흙’ ‘공룡들의 발걸음에 솟구치며 노래하는 흙’ 등 흙의 다양한 모습이 이어진다. 장면마다 흙 알갱이들의 표정이 서로 다르게 그려진 것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흰 눈을 덮고 잠들었던 흙에서 마침내 ‘세상이 일어나는’ 장면은 특히 힘이 넘친다. 줄거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다 읽고 나면 한 편의 긴 서사를 읽은 듯 만족스럽다.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그려도 되는구나 싶은 마음이 든다면 이 책을 잘 읽은 것이다.
봄은 새롭게 보이는 것이 많은 계절이다. 어린이와 함께 자연을 그려보자. 그림책을 따라서 흙을 그려도 좋다. 비, 나무, 꽃, 나뭇잎을 마음대로 그려도 좋다. 바람이나 공기, 물처럼 까다로운 주제에 도전할 수도 있다. 그림에 담긴 어린이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어린이가 그린 그림 같다’는 말을 결코 쉽게 쓸 수 없을 것이다.
김소영 독서교육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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