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성추행 피해자들의 4·7 선거

김태훈 논설위원 2021. 4. 9.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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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잘못이 아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게 성추행당한 피해 여성이 지난해 11월 법정에 출두했을 때 재판장이 한 말이다. 일반 범죄와 달리 성폭력은 피해자가 겪은 고통을 가해자 아닌 자기 탓으로 돌리는 특성이 있다. 성폭력 재판을 주로 맡았던 판사가 그런 피해자 심리를 알고서 건넨 위로였다. 박원순 전 시장도 그런 여성들을 돕던 인권 변호사였다. 그러니 이런 박 전 시장에게 성추행당한 피해자의 심정이 어땠겠나.

▶박원순·오거돈 두 시장에게 성추행을 당한 두 여성은 지난 1년간 성추행 이상의 심각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성추행 사실을 밝힌 ‘죄’였다. 청와대와 국회, 법원을 장악한 세력에 포위됐다. 박 전 시장 피해자는 사람을 죽게 한 가해자란 적반하장 비난과 저주를 들었다. 입만 열면 여성·소수자·인권을 외치던 이들이 더했다. 여성 의원들이 ‘피해 호소인'이란 해괴한 용어까지 만들어냈다. 박원순·오거돈 성추행 사건은 이런 위선자들의 민낯이 드러나는 계기가 됐지만 피해자들의 고통은 너무나 컸다.

▶박 전 시장 피해자는 집요한 2차 가해에 시달리다 못해 “내가 죽으면 인정할까?”라며 모든 비밀번호를 어머니에게 알렸다고 한다. 자식한테 그 말을 들은 부모 심정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네가 죽으면 저 사람들이 네 잘못으로 죽었다고 할 테니 이럴수록 더 씩씩하게 살자”고 다독였다고 한다. 속으론 피눈물을 쏟았을 것 같다. 오거돈 전 시장의 변호인은 민주당 후보 선대위원장이 됐다. 피해자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 전 시장 재판은 별 이유도 없이 선거 뒤로 연기됐다. 피해자는 “얼음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끔찍한 시간”이라고 했다.

▶이 피해자들에게 이번 선거는 단순한 정치 행사가 아니었다. 박 전 시장 피해자가 말했던 것처럼 만약 민주당이 승리했다면 이들은 성범죄로 짓밟히고 이어서 민주주의 제도로 다시 짓밟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사망이다. 오세훈·박형준 두 후보가 선거 승리 후 첫 일성으로 “성폭력 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돕겠다”고 하자 피해자들은 마침내 가족과 함께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미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토머스 제퍼슨은 “열광한 자들은 박해자가 되고 선량한 사람은 그 피해자가 된다”고 했다. 선량한 개인을 보호하지 못하는 민주주의는 다수를 앞세운 폭정일 뿐이란 경고다. 두 여성이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된 데서 그래도 우리 민주주의의 희망을 본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마음의 상처도 말끔히 치유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 딸 가진 아빠의 마음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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