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물리학자의 하루[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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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출근한다.
가는 길에 학교 후문 허름한 단골 김밥집에서 참치 김밥 한 줄을 산다.
책상에 앉아 일하고 있으면 위층에 있는 생명과학과 이 교수가 출근하는 길에 찾아와 인사한다.
이렇게 하루가 가고 블랙홀과 같은 세상을 지나 웜홀과 같은 지하철을 타고 섬 같은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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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 앉아 일하고 있으면 위층에 있는 생명과학과 이 교수가 출근하는 길에 찾아와 인사한다. 내 대학 동기다. 그는 개구리에게 먹이를 주는 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실험용 개구리 수조의 물을 갈아주고 신선한 소간을 먹이로 준다. 먹이를 줄 때 개구리가 자기를 알아본다고 자랑하곤 한다.
가끔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주로 나는 듣는 편이다. 코로나 백신에 대한 의학적인 기초 지식을 듣곤 한다. 이야기가 끝날 즈음 마스크나 주사기를 잘 만드는 것도 좋지만 훌륭한 대학 졸업생들이 많은데 백신과 치료제를 왜 개발하지 않는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런 일은 국가가 나서서 투자해야 하지 않느냐는 결론을 내리지만, 당장 코앞의 가을 홍시 같은 연구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서, 공기 속으로 사라지는 한갓 힘없는 푸념은 두 교수의 이야깃거리일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연구실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후배 교수가 무거운 컴퓨터 가방을 어깨에 메고 지나가다가 인사를 한다. 여성 과학자 김 교수는 밤늦게까지 일하는 스타일이다. 무거운 컴퓨터를 왜 매번 들고 다니느냐고 물어봤더니 불안해서 집에 가지고 가야 한다고 한다. 정작 집에서는 열어 보지도 않는다면서. 지금 중요한 국가적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가끔 함께 점심을 먹을 때도 전화가 계속해서 걸려온다. 국가사업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을 하지만 국가에 대한 불만도 그에 비례해 엄청나다. 그 이유가 다 일을 잘하기 위한 일 아닐까 생각해 보지만, 여성 과학자로서의 삶이 녹록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내 옆방에선 이론물리학을 하는 후배 김 교수가 근무한다. 가끔 일요일에 일이 있어 학교에 오면 옆방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린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공부하는 거라는 이야기를 농담 삼아 말하지만, 내게는 그 열정이 진심으로 들린다.
얼마 전 연구실 복도에서 만났는데 블랙홀 이론을 들려주었다. 최근 아르헨티나 출신의 후안 마르틴 말다세나 박사에 의해 블랙홀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발표되었단다. 1976년 스티븐 호킹 박사에 의해 블랙홀에 정보가 보존되지 않는다는 이론이 발표되었는데, 최근 말다세나 박사의 섬(island) 이론에 의하면 블랙홀에서 “에너지를 포함한 모든 정보가 보존된다”고 한다.
블랙홀의 내부에서 웜홀을 통해 외부로 정보가 전달될 수 있다는 획기적인 이론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았던 블랙홀의 정보 손실 문제가 조만간 해결될지도 모른다. 모든 정보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에서 정보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론이 흥미롭기만 하다. 이렇게 하루가 가고 블랙홀과 같은 세상을 지나 웜홀과 같은 지하철을 타고 섬 같은 집으로 향한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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