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기 싫었는데 무너졌다. 그리고 자유로워졌다" 하니는 용감했다 [인터뷰]

심윤지 기자 2021. 4. 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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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5년 ‘위아래’ 직캠 영상으로 ‘역주행의 아이콘’이 된, 선하고 건강하며 긍정적인 이미지의 여자 아이돌. EXID 출신 안희연(하니)는 영화 <어른들은 몰라요>로 연기를 시작하며 지난 7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자신의 이미지를 제 손으로 허물어버린다. 리틀빅픽처스

연기 경험이 많지 않은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 스크린 데뷔작으로 독립영화를 선택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우선 흥행에 대한 부담 없이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표현해야 할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은 잔잔한 영화라면 연기력에 대한 부담도 덜하다. 레드벨벳 아이린(<더블패티>), 엑소 찬열(<더박스>)과 수호(<글로리데이>), 에프엑스 출신 정수정(<애비규환>) 등이 이 루트를 밟았다.

EXID 하니(안희연)의 행보는 같은 듯 다르다. 첫 걸음부터 예상을 뛰어넘어 저 멀리로 향한다. 2015년 ‘위아래’ 직캠 영상으로 ‘역주행의 아이콘’이 된, 선하고 건강하며 긍정적인 이미지의 여자 아이돌. 그는 영화 <어른들은 몰라요>로 연기를 시작하며 지난 7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자신의 이미지를 한번에 허물어버린다. 자신을 때린 남자에게 ‘짱돌’을 들고 악에 받친 눈빛으로 덤벼들면서. “X발! 내 몸에 손 한번만 대봐. 그땐 진짜 찍어 죽여.”

<어른들은 몰라요>는 <박화영>을 만든 이환 감독의 신작이다. 가정과 학교에서 버림받은 10대 임신부 세진(이유미)의 ‘유산 프로젝트’가 줄거리다. 하니는 세진을 도와주는 친구이자, 가출 4년차 18세 주영 역을 맡았다. 담배와 욕설은 기본이고, 성매매나 약물투약같은 자극적 장면도 소화해야 했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의 극한까지 내몰리는, 결코 쉽지 않은 캐릭터다. 그는 왜 하필 이 영화를 ‘첫 연기 도전작’으로 골랐을까.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나 이유를 들었다.

“영화 출연 제의를 감독님께 인스타그램 DM으로 받았어요. 그때 저는 전 소속사와의 계약이 끝나고 그리스로 여행을 떠나 있었어요. 보통 계약이 끝날 때쯤부터 다른 소속사와 미팅도 하면서 준비를 하는데, 그다음으로 넘어가질 못하겠더라고요. 내가 뭘 좋아하고 원하는지 알고 싶은데, 내가 나에게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았어요.”

처음엔 출연을 고사했다. 연기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너무 센 배역도 부담스러웠다. 영화 촬영 일정은 임박했는데, 소속사 없이 이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기도 벅찼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오면 한번 만나자’는 감독의 설득에 ‘일단 한번 만나보자’고 생각했다.

“감독님께 딱 한 가지를 물었어요. ‘앞으로 내가 뭘 할진 모르겠지만 세상을 조금 더 좋은 쪽으로 만들고 싶다. 그런데 이 영화가 그쪽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맞냐’고요. 감독님은 ‘이 영화가 세상을 바꿀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나도 그런 꿈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오케이’ 했어요.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상태가 아니었기에 많은 것을 따질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요.”

<어른들은 몰라요>는 가정과 학교에서 버림받은 10대 임신부 세진(이유미)의 ‘유산 프로젝트’가 줄거리다. 하니는 세진을 도와주는 친구이자, 가출 4년차인 18세 주영 역을 맡았다. 리틀빅픽처스
어른들과 다른 삶을 살아보려 하지만 어른들을 절대 이기지 못하고, 끝내 그 모습을 닮아가는 ‘애어른’들의 모습을 보다보면 이환 감독의 전작 <박화영> 못지않게 마음이 불편해진다. 이 감독은 <어른들은 몰라요>에서 파란머리 재필 역(가운데)을 맡았다. 리틀빅픽처스

<어른들은 몰라요>는 가출 청소년의 현실을 고발한 전작 <박화영>의 외전 격인 작품이다. 전작의 주변 인물이었던 세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어른들과 다른 삶을 살아보려 하지만 어른들을 절대 이기지 못하고, 끝내 그 모습을 닮아가는 ‘애어른’들의 모습을 보다보면 전작 못지않게 마음이 불편해진다. 하니가 연기한 주영은 관객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는 인물이다. 힘의 논리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는 <박화영> 속 아이들과 달리, 주영은 실상 아무 도움이 안 될지라도 무조건적으로 세진을 돕는다.

“영화에선 주영이 세진에게 유대감을 느끼는 과정이 설명돼 있지 않아요. 굉장히 의아했어요. 내가 어른이어서 그런가 싶고…. 처음 주영이 세진에게 접근할 때까지만 해도 목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세진이 위험에 빠지자 달리는 오토바이에 뛰어들면서까지 도움을 요청해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더라고요.”

서사의 빈틈이 주는 의아함은 이환 감독만의 독특한 연출법인 ‘워크숍’으로 해소했다. 세진 역의 이유미, 재필 역을 맡은 이 감독과 함께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주영의 ‘전사’를 만들어나갔다. “주영은 어떤 오해로 인해 학교폭력 가해자로 지목되지만 어느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결국 도망쳐버린 인물이에요. 주영은 세진에게서 자신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봐요. 세진에게 이용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계속 남아 있는 이유가 이해되기 시작했죠.”

대본에 구애받지 않고, 극중 인물이 되어 다양한 상황을 자유롭게 표현해보는 워크숍을 통해 그는 주영이란 인물의 ‘공동창작자’가 됐다. “처음 시나리오로 접한 주영은 굉장히 날카롭고 뾰족하고 사포 같은 인물이었어요. 그런데 완성된 영화를 보니 저라는 사람이 연기하면서 조금 더 따뜻함이 입혀진 거 같더라고요. ‘나 때문에 어떤 인물의 한계가 만들어진 게 아닌가’ 감독님에게 미안하기도 했다가 ‘아니야. 오히려 내가 해서 다행일지 몰라’ 생각했다가… 오락가락했어요(웃음).”

주영은 아무 도움이 안 될지라도 무조건적으로 세진을 돕는다. 리틀빅픽처스

주영이 되는 것은 인간 안희연을 둘러싸고 있던 세계를 허무는 과정이었다. “욕설 연기가 가장 고민이었어요. 연습생 때부터 욕은 저에게 ‘하면 큰일 나는’ 금기였거든요. 그게 무의식에 배어 있다보니까 욕을 뱉어내야 하는데 직전에 멈칫하게 되는 거예요.”

주영과 안희연 사이의 긴장은 영화 후반부, 돌로 상대방을 내리치는 폭력 장면에서 정점에 달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무언가가 끊어져버리는 장면이에요. 인간 안희연은 평생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왔거든요. 그 장면 워크숍을 할 때도 도저히 못내려치겠어서 눈물이 막 나오고 나를 때리기도 하고…. 하지만 무너져야 했고, 그래서 무너졌어요. 그런데 죽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자유로워졌어요.”

그는 이 작품 이후 연기에 재미를 느꼈다고 했다. 지난해 드라마 <엑스엑스>를 시작으로 <SF8-하얀 까마귀> <아직 낫서른> 등에 잇달아 출연하며 본격적인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삶”을 지향한다는 그는 최근 심리상담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자신이 자신으로 온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아이돌 업계의 모순을 알기에, 언젠가는 마음이 다친 후배들을 상담해주고 싶다고 했다. “심리상담사가 되겠다는 목표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런 목표를 정할 수도 없고요. 다만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고,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도움이 될 것 같은 일을 할 뿐이에요.”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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