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파일러 이수정] 스토킹은 살인 예고편이다

한겨레 2021. 4. 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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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일러]

이수정ㅣ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또 그녀였다. 방송을 마치고 나오는 주차장 출구에서 오늘도 그녀의 기쁨과 걱정이 뒤섞인 얼굴을 마주했다. 부스스한 머릿결에 화려한 옷가지.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몇 시간은 밖에서 벌벌 떨면서 기다린 모습이다. 어디라도 데리고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겠으나 전혀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그녀와의 조우가 만남보다는 침입으로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도 역시 본인을 성착취의 피해자라고 호소하였다. 지난번에는 눈물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차량 앞으로 갑자기 뛰어들어 당황했었으나 오늘은 봉투를 내민다. 지난번 조우 때, 이메일을 주시면 도와드릴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하였지만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 오늘 갑자기 또 나타나 자신은 현재 철저히 감시당하고 있기 때문에 휴대폰도 피시(PC)도 사용하지 못하여 피해 사정을 글로 적어 왔다며 서류를 내민다.

귀가 후 열어본 봉투에는 고통스럽고 억울하고 무섭다는 내용과 언제 어느 때 감시를 받는지를 나열한 갱지의 글이 세 페이지나 담겨 있었다. 글자는 또박또박 적혀 있었고 자신의 어려운 처지와 도와달라는 말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편지의 어느 구석에도 성착취 사건의 구체적 정황은 기술되지 않았으며 가해자가 누구인지 역시 특정되지 않았다. 기승전결 없이 자신의 입장만 피력하는 내용들로 가득하였다.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일은 경찰 신고보다는 병원 진료를 설득해야 하는 듯하였다.

하지만 누군가 만일 필자와 달리 정신병리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는 채로 가는 곳마다 괴성을 지르며 뛰어드는 여성의 추적을 받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특히 인적이 드문 곳이라면? 틀림없이 당황스럽고 불안할 것이다. 만일 여성이 아니라 남자, 귀갓길 언제나 나타나 자신이 피해자라고 호소하는 젊은 남자라면? 극도의 공포심이 느껴질 법하다.

스토킹은 이처럼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어난다. 예상하지 못한 채 발생하는 일들은 당연히 놀라움을 유발하고 나아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힘들 땐 생명의 위협감도 느끼게 될 것이다. 필자의 사례처럼 스토킹은 연인 간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오프라인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더욱 아니다. 이메일을 통해, 에스엔에스를 통해, 심지어는 기사의 댓글로도 지속적인 괴롭힘은 발생할 수 있다. 드디어 ‘스토킹처벌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여 9월부터는 발효된다고 한다. 늦었지만 천만다행한 일이다.

최근 서울 노원구에서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였다. 온라인 게임에서 알게 된 청년이 구애를 목적으로 함께 게임을 했던 여성 유저를 찾아 나섰다가 만나달라는 청을 거절당하자 여성 유저와 그녀의 가족들을 몰살시킨 사건이다. 지난달 23일의 일이었는데, 그는 이후 현장에서 여러 번 자해를 시도하다 26일 피해자의 친구들이 신고해 검거되었다. 현재 피의자는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남성은 3개월간 여성의 개인정보와 주거지를 찾아내어 스토킹을 해온 것으로 파악된다. 범행 당시 자신이 가지고 있던 휴대폰은 초기화하여 스토킹의 증거를 모두 지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스토킹으로 힘들었던 피해자는 자신의 곤란한 처지를 친구들에게 호소했었다. 사건이 수사 초기 그 흔한 연인 간의 ‘이별 범죄’라고 단정 지어지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친구들의 증언 때문이었다.

우리는 스토킹이 치명적일 수 있음을 평가절하한다. 기껏 따라다니고 만나달라고 문자 보내고 집 앞에서 기다리는 것으로 죽기야 하겠냐고 경시한다. 하지만 사실상 여성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의 30% 이상에서 스토킹이 살해 전 동반됨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3개월 전 스토킹을 신고하고 경찰이 접근금지명령이나 유치명령 등으로 이 편집증적 관계망상을 지닌 게임 유저에게 강제 개입만 했어도 노원구 세 모녀가 살해되었을까? 너무나 아쉬운 죽음이다. 스토킹처벌법이 9월부터는 이런 억울한 죽음을 미리 막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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