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수 칼럼] '염치'에 관하여

박찬수 2021. 4. 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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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 칼럼]'민주당이 좀 문제가 있더라도 국민의힘보다는 나은 게 아니냐'라는 비교우위 논리로는 더이상 국민을 설득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선거 장면 중 하나는 김영춘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가 지난 20년간의 부동산 거래 내역을 공개한 것이었다. 왜 민주당 국회의원 전원이 자발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할까. 먼저 투명하게 내보이고 잘못된 걸 잘라내지 않으면, 국민 신뢰는 돌아오지 않는다.
국민의힘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가 7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 개표상황실에서 방송3사(KBS,MBC,SBS) 공동 출구조사 결과를 지켜보다 자신의 승리가 예측되자 눈을 감고 감격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찬수 선임논설위원

“염치(廉恥)는 있는가.” 투표 이틀 전인 5일, “도와달라”는 박영선 후보의 요청에 여영국 정의당 대표는 “염치가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그날 더불어민주당의 김부겸 전 의원은 “염치 불고하고 호소드린다. 박영선·김영춘 후보를 다시 한번 생각해달라”고 호소했다. 여영국 대표의 싸늘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새벽 박영선 후보는 서울 구로동 서민들의 애환을 실은 6411번 버스를 타고 노회찬 정신 계승을 강조했으니, 그래도 ‘염치는 있다’고 해야 할까. 염치없다는 핀잔을 받은 게 어디 박영선 후보 개인의 잘못이겠는가.

돌아보면, 이번 보궐선거의 키워드는 ‘염치’가 아닐까 싶다. 서울과 부산에서 임기 1년을 앞두고 뜻하지 않은 보궐선거를 치르게 된 것 자체가 전적으로 여당인 민주당의 책임이다. 더구나 자기 당 공직자의 중대 범죄로 보궐선거가 발생하면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던 게 불과 5년 전이다. 그 약속을 깨고 당헌당규까지 바꿔가며 서울과 부산시장 후보를 냈으니,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셈이다. <한겨레>가 민주당 결정을 비판하는 사설(‘떳떳지 못한 민주당의 서울·부산시장 공천 결정’, 2020년 11월3일치)을 썼는데, 평소 잘 아는 민주당 국회의원이 전화를 걸어와 “명분은 없지만, 서울·부산시장을 모두 놓치면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의 국정운영이 어려워진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라고 말했던 게 기억에 생생하다.

그 ‘어쩔 수 없는 선택’ 때문에 임기 말 레임덕이 본격화하고 내년 3월의 대선 판도까지 흔들릴 지경이 됐으니, 정치란 참 아이러니하다.

눈앞의 실리를 위해 그까짓 명분을 뒤로 물릴 때 ‘염치’는 사라졌다. 선거란 기본적으로 집권세력 공과에 대한 심판의 성격을 띤다. 서울·부산시장 선거 결과는 정부·여당에 ‘염치’를 회복하라는 준엄한 경고일 것이다. 두가지가 필요하리라 본다. 첫째는 코로나 와중에서 심해진 격차를 완화하고 사회안전망을 확대하는 일이다. 문재인 정부는 2016년 촛불 광장에서 터져나온 목소리 중 하나가 사회적 불평등 해소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민심이 부동산값 폭등에 분노하고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건에 폭발한 이유도, ‘정권이 바뀌어도 해먹는 놈은 다 해먹고 사회적 불공정·불평등은 여전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 국민의 삶이 조금은 더 나아지고 격차가 줄어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게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목표가 되었으면 한다.

둘째는 정부·여당이 먼저 ‘내로남불’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 뼈를 깎는 대변신을 해야 한다. ‘민주당이 좀 문제가 있더라도 국민의힘보다는 나은 게 아니냐’라는 비교우위 논리로는 더이상 국민을 설득할 수 없음을 보궐선거는 여실히 보여줬다. 자꾸 국민의힘 또는 강남 보수세력과 비교할 게 아니라, 민주당 먼저 스스로의 특권을 없애고 국민 눈높이에 맞추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선거 장면 중 하나는 김영춘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가 지난 20년간의 부동산 거래 내역을 공개한 것이었다. 왜 민주당 국회의원 전원이 자발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하는가. ‘국회 차원에서 하려 해도 국민의힘이 반대해서 어렵다’는 건 핑계일 뿐이다. 집권세력 스스로 먼저 내보이고 잘못된 부분을 잘라내지 않으면, 국민 신뢰는 돌아오지 않는다.

앞으로 정국은 요동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레임덕이 시작되고, 민주당 우세가 점쳐졌던 내년 3월 대통령선거는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안갯속으로 들어설 것이다. 그 점에서 2011년의 데자뷔다. 그때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리하게 무상급식 신임투표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전혀 뜻밖의 시민운동가 박원순씨가 새 시장에 당선되지 않았더라면,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한 안철수 대표가 대선에 뛰어들어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단일화만 하지 않았더라면, 2012년 12월 대선이 그렇게까지 접전으로 치닫진 않았을 터다.

민주당에 정말 두려운 건 지금부터다. 예상보다 큰 지지율 격차는 민심의 무서움을 고스란히 드러냈지만,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겨야 한다. 국민의힘이 그런 지지를 받을 만큼 국민 신뢰를 회복했다고 보긴 어렵다. 대선을 1년 앞둔 시점이기에 유권자들이 훨씬 더 강한 회초리를 집권세력에 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준엄함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잠깐 고개를 숙이는 걸로 위기를 넘어가려 하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을 받으리란 걸 알아야 한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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