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경수]사법제도 신뢰 훼손하는 '한명숙 구하기'
검찰 길들이기, 사면 명분 쌓기로 비쳐
정작 당사자 모습만 보이지 않아
떳떳하다면 본인이 직접 말하고 책임져야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은 법인가. 청주 한씨 종친 건설업자 한만호로부터 3회에 걸쳐 받은 정치자금 9억 원이 한명숙을 무너뜨렸다. 기소 후 장장 5년간의 재판 끝에, 2015년 8월 대법원은 그의 정치자금 수수를 유죄로 확정했고, 그는 2년을 복역한 뒤 만기 출소했다. 그는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라는 명예와 함께 최초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국무총리라는 씻기 힘든 불명예도 안았다. 정치와 돈의 얽히고설킨 숙명적 관계 때문일까? 미국에 유학 간 아들에 대한 모성애 때문일까?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9억 원의 불법 정치자금으로 무너진 것은 한명숙 개인만이 아니었다. 한명숙의 몰락은 그가 상징했고, 그가 대표했던 진보좌파의 도덕성에도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악(惡)보다 더한 것이 위선(僞善)이라고 했다. 조국 전 장관 일가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지만, 충격의 정도나 상처의 깊이는 한명숙 사건이 더 컸다.
진실의 판단은 궁극적으로 신(神)의 영역이다. 법원이 유죄를 선고했다고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명숙에 대한 유죄 판결은 그냥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3회에 걸쳐 돈을 받은 장소가 바뀌는 과정이 부정한 돈을 받는 사람의 심리 상태와 일치한다. 요청받은 기한에 수표를 현금으로 다 바꾸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한명숙에게 수표 1억 원을 전달하게 된 경위는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한만호 계좌에서 나온 1억 원 수표가 한명숙 동생의 전세자금으로 쓰인 것도 금융거래로 확인된다. 주고받은 돈에 미국 달러가 포함된 것이 한명숙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고, 그가 왜 그런 요청을 했는지도 자연스럽다. 한만호의 건강이 악화되고 사업이 부도나자 현금 2억 원을 되돌려준 것도 사실이다. 한명숙은 검찰의 소환에 일절 불응했고, 법정에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국무총리를 지낸 국가의 원로라 할지라도 피고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럴 수 있다. 세상의 법률이 보장하는 피고인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인의 자세는 세상 법과는 다르다.
‘한명숙 사건 뒤집기’가 진행 중이다. ‘무죄를 확신한다’던 대통령 언급 때문인지, 진보좌파 인터넷 언론이 앞장서고 여권 핵심 인사들도 ‘대모 구하기’ 대열에 나섰다. 비망록, 모해위증교사, 재심, 합동감찰 등 생경한 용어가 등장하나 연극의 소품에 불과하다. 편 가르기가 일상이 된 탓인지 박범계 법무장관도 등장한다. 책상 가득 펼쳐 놓은 6000쪽 사건기록을 검토하는 박 장관의 모습은 추미애 전 장관의 온갖 기행(奇行)을 떠올리게 한다.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 이 사진을 보이고 싶었던 것일까? 그 모습에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그의 처지가 측은하기만 하다. 이미 나온 무혐의 결론을 뒤집기 위해 장관의 지휘권이 발동된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이런다 해서 진실이 뒤집힐 수 있을까? 이 사건으로 그들이 입은 도덕적 상처를 추스르고, ‘대모’에 대한 사면의 명분을 얻으려는 것일까? 혹여 차제에 말 안 듣는 검찰을 옥죄고 길들일 수단을 찾으려는 것은 아닌가? 철 지난 한명숙 사건을 둘러싸고 국가 형사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 가운데 당사자 본인의 모습은 없다. 떳떳하다면 이제 한명숙 본인이 직접 링 위로 올라와야 한다. 남의 입을 빌려 변죽만 울리고 뒤에 숨을 일이 아니다.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말해야 하고, 책임도 본인이 져야 한다. 이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다.
김경수 객원논설위원·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세훈 시장은 출근 첫날 왜 ‘1호 결재’를 미뤘을까?
- 재보선 참패에 고개 숙인 與…지도부 전원 ‘물러납니다’[청계천 옆 사진관]
- 與 지도부 총사퇴 “전당대회·원내대표 경선 조기 실시”
- [4·7 재보궐선거 최종 결과] 오세훈 57.50%, 박영선 39.18% (종합)
- 오세훈, 서울 25개 자치구 전 지역서 승리… 2018년 與 싹쓸이와 정반대
- 오세훈 당선 일등공신 ‘20대 남’…72.5% 압도적 지지
- 박원순 성추행 피해자 “오세훈 당선 연설에 울었다”
- 文정부를 향한 ‘분노 쓰나미’ 휩쓸고 간 4·7 재보선
- 확인된 부동산 분노…공시가-LH-주택정책 대수술 이뤄지나
- 이재명 지지율 24%로 1위…윤석열 7%P 빠져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