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우리에겐 코레아노 커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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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동네에는 미제 장수 아주머니가 드나들었다.
그 시절 누구나 커피잔 세트를 갖고 싶어했고, 그때 장만해둔 세트가 요즘 중고장터에 많이 보인다.
커피 마니아들의 토론을 들어보면 엄청난 디테일과 정보량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게다가 갓 내린 커피를 가지고 수십 가지나 되는 복합음료를 즉석에서 제공하는 카페들이 널려 있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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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동네에는 미제 장수 아주머니가 드나들었다. 내 기억으로는 정말로 전통의 보따리장수답게(보부상의 보(褓)가 바로 천 보따리라는 의미다) 색색의 천에 물건을 담아 끌러냈다. 다이알비누며 무슨 샴푸에 땅콩버터와 가루오렌지주스가 튀어나왔다.
커피도 빠지지 않았다. 금속 뚜껑의 맥스웰커피가 인기였다. 1970년대를 휩쓴 ‘집장수 집’은 똑같이 찍어낸 구조를 갖고 있었는데 반드시 응접실이 배치되었다. 응접 소파에 앉아 맥스웰커피를 대접하는 것이 당시 한국인이 꿈꾸던 행복하고도 표준적인 삶이었다. 그 시절 누구나 커피잔 세트를 갖고 싶어했고, 그때 장만해둔 세트가 요즘 중고장터에 많이 보인다. 시간이 흘러 90년대, 어마어마한 노동을 하면서 먹고살기 위해 전 국민이 줄달음치던 시기의 동반자가 바로 지금도 인기 있는 봉지커피였다. 뜨거운 물에 타기만 하면 간단히 마실 수 있는, 숭늉을 밀어낸 국민커피. 무섭게 보급되던 정수기에 온수장치가 달리고, 더 편리하게 인스턴트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동네 식당에도 커피 자판기가 설치되던 때였다.
배전두커피라는 말을 기억하시는지. 70년대 다방 커피는 볶아서 공급되던, 그러니까 배전두 원두커피를 팔았다. 인스턴트 가루커피에 밀려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원두커피가 2000년대 들어 다시 한국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먼 길을 돌아 다시 원두의 시대가 온 셈이었다. 물을 많이 타서 내는 미국식 커피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아메리카노가 한국의 국민 커피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줄 누가 예상했으랴.
좋은 원두커피를 사기 위해 일본이나 유럽으로 가던 광들이 있던 때가 2000년대 초반 언저리였다. 한국의 원두커피는 대체로 질이 낮았고, 원두에 대한 이해도 거의 없었다. 그러던 한국이 이제 세계 수준의 커피 왕국이 되었다. 동네 어디서든 수준 높은 원두를 구할 수 있고, 로스팅을 직접 하는 카페를 만나기도 쉽다. 커피 마니아들의 토론을 들어보면 엄청난 디테일과 정보량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커피 전문가들은 최상급 커피 농장에 직접 구매하러 가기도 하고, 국제경매시장에서도 큰손의 상당수가 한국인이라고 한다. 한국인은 세계의 흐름에 뒤늦게 뛰어들지만, 일단 물결을 타면 일등을 하지 않으면 못 배긴다. 그런 정서가 커피에도 투영되는 것 같다. 단언컨대, 이미 한국의 커피 맛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 있다. 고품질 원두로 드립 커피를 즐기는 인구비율도 아마 그럴 것이다. 게다가 갓 내린 커피를 가지고 수십 가지나 되는 복합음료를 즉석에서 제공하는 카페들이 널려 있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스타벅스는 알다시피 이탈리아의 커피 문화를 토대로 성장한 미국식 커피 브랜드다. 아메리칸도 아니고 아메리카노라는 이탈리아어의 커피를 파는 카페다. 어쩌면 우리가 즐기는 커피는 이탈리아식도, 미국식도 아니다. 딱 잘라 말해서 그냥 우리 커피는 ‘코레아노 커피’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뭐든 했다 하면 수많은 ‘덕후’와 전문가를 양산해내는 한국다운 일이 커피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하여튼 그 덕에 우리는 질 좋은 커피를 마신다. 에스프레소를 파는 곳이 없어서 이탈리아문화원이나 프랑스문화원을 가던 시대가 불과 20년 전이었다.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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