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서 왔으나 조선시대 사람 중심 '인문 풍수' 꽃피웠죠"

강성만 2021. 4. 7.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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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풍수 전문가 최원석 경상대 교수

경기도 파주의 인조 장릉을 답사하고 있는 최원석 교수. 최 교수는 “지리정보시스템을 활용해 조선시대 사람들이 염두에 둔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명당 모형을 일반화하고 그 특징을 분석하고 싶다”고 했다. 최원석 교수 제공

<조선왕실의 풍수문화>(지오북 펴냄).

풍수 전문가 최원석 경상대 교수가 지난 10년 동안 조선 시대 궁성과, 왕의 태가 묻힌 태실지와 산릉(왕릉) 60여 곳을 둘러보고 조선 풍수문화의 실상을 다룬 책이다. 각 풍수 공간의 조성을 둘러싼 역사와 풍수 논쟁 그리고 풍수와 권력 사이에 얽힌 이야기도 풍부하다.

2011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저술 지원을 받고 10년 만에 나온 이번 책에는 저자가 직접 찍은 현장 사진과 고문헌 속 지도와 그림도 수백장 실려 글의 이해를 돕는다. “왕태실지는 20여 곳, 산릉은 40여 곳을 답사했죠. 태실지는 다 가봤고 산릉은 북한에 있는 제릉과 후릉, 출입이 통제된 효릉(고양 서삼릉)을 빼곤 다 찾았어요.”

최 교수는 92년에 서울대 지리학과 대학원에서 한국 자생풍수 이론을 정립한 최창조 교수 지도로 석사 학위를 받은 이래 30여 년 동안 한국 풍수의 역사와 본질을 밝히는 데 힘을 쏟았다. <한국의 풍수와 비보> <사람의 지리 우리 풍수의 인문학> <산천독법> 등 풍수를 다룬 저술도 여럿이다.

지난 5일 전화로 만난 최 교수는 “중국에서 시작된 풍수를 한국에서 꽃피웠고, 그 정점은 조선시대였다”고 했다.

<조선왕실의 풍수문화> 표지.

“중국만 해도 땅이 넓어 지역에 따라 풍수 영향이 편차가 있었죠. 당나라 때 성행했지만 보편적이고 일반적이지는 않았어요. 왕실과 지배계층, 큰 도읍 위주로 믿었죠. 일본도 영향이 크지 않았어요. 왕도인 교토를 잡을 때 정도였죠. 우리와 같이 왕릉을 정할 때 보는 산릉 풍수도 없었고요. 지금 오키나와 땅인 류큐는 정책 입안자들이 풍수를 받아들여 도시계획을 했지만 서민들한테는 영향이 크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국은 풍수가 삼국시대 말에 중국에서 들어온 이후 900년 가까이 전 국토, 전 계층에서 신봉했단다. “우리는 풍수문화가 왕이나 사대부는 물론 서민까지 영향을 미쳤어요. 마을 곳곳에 풍수 설화도 매우 많아요.”

그는 조선 풍수문화의 위력을 잘 보여주는 예로 왕의 탯줄을 묻는 태실지 조성을 들었다. 조선왕실은 자손이 태어나면 먼저 아기태실을 조성하고 나중에 왕세자로 책봉하거나 왕이 되면 새로 형식을 갖추어 가봉태실을 만들었다. 고려 후기에 정착된 제도로, 조선 초에는 태실지를 주로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삼남 지역에서 구했다. 일제 강점기에 태실지 원형이 크게 훼손됐고 지금은 대부분 태실지 자리에 일제 시절의 유력 민간인 묘가 들어서 있다.

그는 왕태실지는 한국 만의 독특한 풍수 유적이라고 했다. “조선왕실은 탯줄을 풍수적으로 좋은 환경인 길지에 묻으면 태의 주인공이 건강하고 성공적인 삶을 산다고 믿었어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태실지를 중국 풍수서 <태장경>에 근거해 만들어요. 하지만 중국은 한국과 같이 석물과 태봉(태항아리를 묻은 봉우리)을 갖춘 태실을 찾아볼 수 없어요.” 그는 조선의 왕태실지와 궁성, 산릉 풍수를 두고 “조선왕실은 탄생과 삶, 죽음까지 생애 공간 자체를 풍수와 연관 지어 사고했다”고 풀었다.

왜 조선은 풍수를 중시했을까? 그는 ‘효 이데올로기’와 ‘왕실 번영을 바라는 마음’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봤다. “송나라 유학자 주자가 풍수론 저술 <산릉의장>에서 ‘부모님은 사후 안온한 곳에 모셔야 한다’고 했는데 이 견해가 조선에서 전적으로 받아들여졌죠. 조선 왕조의 번영을 바라는 마음은 산릉풍수로 이어졌고 출세의 기회가 제한된 서민들도 풍수에 기대어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으려 했죠.”

10년 연구 ‘조선왕실의 풍수문화’
궁성·태실·왕릉 등 60여곳 답사
탄생·삶·죽음에 공간 영향 중시
“왕실만 아니라 서민까지 광범위”

지속가능한 생태조건 조성에 기여
“지리학 관점 현대화·과학화 필요”

조선 왕 중에는 태조와 태종, 세종, 선조, 광해군, 정조 등이 풍수에 대한 믿음이 깊거나 활용 정도가 높았고 성종과 중종은 풍수에 부정적이었단다. 저자에게 풍수와 관련해 가장 인상적인 왕은 사도세자 아들인 정조다. “정조는 웬만한 풍수 관헌보다 풍수에 대한 식견이 높았어요. 비운의 죽음을 맞은 아버지를 왕이 되어 좋은 자리에 모시려고 풍수 공부를 열심히 했죠. 자신이 주도해 아버지를 모신 융릉의 위치와 배치, 조경까지 정했어요. 융릉에 흐르는 맥을 막아서는 안 된다며 정자각을 능침에서 비켜세우도록 했죠.” 정조는 이렇게 풍수를 잘 알았지만 “백성 마음이 안정되어야 풍수도 좋아진다”며 산릉이나 태실지 조성 때 민생을 앞세우는 마음도 보였단다. 세종도 풍수에 밝아 산릉의 입지를 정하는 데 관여하기도 했지만 정작 자신은 풍수에 구애받지 않고 아버지(태종) 옆에 묻으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효성의 발로이죠. 세종은 완벽한 명당이 아니라도 보완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경기 화성 융릉의 능침 뒤에서 바라본 입지경관. 정자각이 정면에서 비켜있는 것은 정자각이 능침을 막아서는 안된다는 정조의 풍수적 견해 때문이었다고 한다. “묏자리가 낮고 평평한데 정자각이 중앙에 자리 잡으면 안산이 비록 가로막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루의 기운은 퍼지지 못하니 형세 상 좌우측으로 옮겨야 될 듯하다.” <현륭원원소도감의궤>에 나오는 정조의 말이다. 사진 최원석 교수 제공
숙종 첫째 왕비인 인경왕후의 단릉인 익릉 능침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산자락이 겹겹이 장막을 두르고 있다. 사진 최원석 교수 제공
태조의 건원릉 능침 뒤에서 바라본 전경. 사진 최원석 교수 제공

그는 한국의 풍수는 한마디로 ‘사람의 풍수’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땅의 풍수가 한국에서 사람의 풍수가 됐어요. 명당의 지형 조건을 도그마에 빠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조금씩 보완하면 된다고 봤죠. 사찰과 탑을 조성해 명당 조건을 보완한 고려의 비보 풍수도 그렇고, 조선 시대는 유교의 영향으로 덕을 강조했어요. ‘사람의 덕이 땅의 길흉을 관장한다’는 인성 풍수이죠. 저는 고려의 비보와 조선의 인성 풍수를 합쳐 한국 풍수를 인문 풍수라고 부릅니다.”

그가 보기에 풍수는 환경이라는 말의 원형에 가장 가깝다. “요즘 쓰는 생태라는 말은 예전에는 없었어요. 환경도 근대적 번역어입니다. ‘풍수가 안 좋으니’라는 말은 생태적 조건이 좋지 않다는 뜻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서 인물을 내고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마을 숲을 만들고 물줄기도 끌어왔어요. 풍수를 좋게 하려고 만든 마을 숲은 너무 많아 집계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지속가능한 생태적 조건을 만드는 데 풍수의 역할이 컸어요.”

최원석 교수. 사진 최원석 교수 제공

풍수학이 제도권 학문으로 자리 잡았는지 묻자 그는 “요즘 논문도 많이 나오고 연구도 활발해 학문적 체계 정립에 가까워지고 있다”며 말을 이었다. “풍수 전공자들은 대부분 디지털 대학이나 대학원 대학에 있어요. 일반 대학 지리학과에는 전임 교수가 한 명도 없어요. 풍수 과목도 없고요. 저도 경남문화연구원 기금 교수로 경상대에서 가르치고 있어요. 대학에서 인성 과목을 가르치고 있어요.”

그는 풍수 연구의 과학화, 현대화를 위해선 일반 대학에서 풍수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풍수학은 1970~80년대는 1단계로 전통 풍수지식을 복원하는 데 치중했죠. 90년대부터 2010년까지는 2단계로 풍수 문화사와 이론사를 체계적으로 조명했어요. 몇 년 전부터 시작된 3단계는 현대화, 과학화가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선 현대 지형학을 익힌 지리 전공자들이 풍수를 조명해야 합니다. 전통 풍수 지식을 현대 과학적 이론과 언어로 바꿔야 합니다. 좌청룡, 우백호 같은 말은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통하지 않아요. 또 문화나 역사적 접근을 넘어 자연과 환경, 생태 차원에서 풍수를 조명해야죠.”

그는 박사 학위를 모교가 아닌 고려대 지리학과 대학원에서 2002년에 ‘영남지방의 비보’ 연구로 받았다. “스승인 최창조 교수가 제가 석사 학위를 끝내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서울대를 떠나셨거든요.” 풍수 연구는 어떻게 시작했을까? “서양 지리학이 저한테는 몸에 편하지 않았어요. 마치 스파게티나 피자를 매일 먹는 것 같았죠. 마침 제가 대학원에 들어갈 때 최창조 교수가 전북대에서 서울대로 옮겨 온 것도 영향을 미쳤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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