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갤러리에 펼쳐놓은 '삭제의 정원'..콘크리트에 축적된 시간의 흔적

배문규 기자 2021. 4. 7.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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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서울 삼청동 바라캇 컨템포러리 갤러리 앞 야외 설치 작업.

“경찰 분들이 몇 번이나 묻고 가셨어요. 나무에 노란 테이프 이거 뭐냐고. 작품이라고 계속 설명드렸죠(웃음).”

청와대 코앞에 있는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선 지난달 31일부터 영국 조각가 마이클 딘의 국내 첫 개인전 ‘삭제의 정원(Garden of Delete)’이 열리고 있다. 이화선 바라캇서울 디렉터의 말처럼 갤러리 초입 가로수에는 공사장 접근금지 테이프가 얼기설기 걸려있다. ‘FUCKSAKE’ 그리고 ‘SORRY’라고 쓰여있는 테이프들은 2017년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서 시도했던 야외 설치 작품이다.

문을 열면 이번에는 사람만한 콘크리트 기둥이 앞을 막는다. 그 너머로 보이는 폐허. 깎이고 부서진 콘크리트 덩어리, 녹슨 철골 골재가 앙상하게 드러난 건축물의 잔해, 미라처럼 부식된 인체 형상이나 동물의 뼛조각, 찢기고 구겨진 책들, 고대 문자 같은 파편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작가가 새하얀 전시 공간에 펼쳐놓은 ‘삭제의 정원’이다.

갤러리에 콘크리트 조각을 늘어놓은 ‘삭제의 정원’ 전시 전경. 바라캇 컨템포러리 제공
‘삭제의 정원’ 전시 전경. 바라캇 컨템포러리 제공


작업은 영국 일포드에 있는 마이클 딘의 작업실 정원에서 시작됐다. 작가는 정원에 놓여있는 자신의 콘크리트 조각 작품들이 계절과 날씨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글쓰기’를 떠올린다. 그의 주요 재료인 콘크리트는 주변 환경에 반응하면서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현대 산업사회의 건축물, 길거리의 보도블럭, 전봇대의 갖가지 광고 전단지, 씹다 뱉은 껌 등 콘크리트에는 인간이 버린 잔해들도 쌓여간다. 작가는 많은 시간과 언어의 흔적이 축적된 콘크리트를 현대의 ‘팔림프세스트(원래 내용을 지운 뒤 다른 내용을 덮어 기록한 양피지 사본)’로 정의했다.

작품 여기저기서 마주하는 것은 X 표시다. 작가는 조각이 변하는 모습을 키보드의 ‘삭제(delete)’로 표현하는데, 여기서 삭제는 작품의 완전한 소멸이 아니다. 시간 흐름에 따라 잠시 멈춘 조각의 상태를 의미한다. 세계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질서에서 무질서를 향해 나아간다는 ‘엔트로피’ 개념에서 착안한 것이다. 삭제의 정원에선 식물이 시들면서 씨앗을 내고 다시 새싹이 나오듯, 조각들이 편집과 삭제(부식과 풍화)의 과정을 거치며 의미를 생성해가는 셈이다. 알 수없는 혼돈처럼 느껴지던 조각의 세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손가락, 주먹, 글자, 형태들이 점차 생생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갤러리 2층에는 작가가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동안 작업한 키스 드로잉 연작이 있다. 올리브유와 립스틱을 바른 입술로 작가 자신의 키스마크를 찍고, 그 위에 시멘트 가루를 흩뿌려 형상을 고착시켰다. 감각적인 키스의 찰나적 순간 역시 X자 형태 모래시계의 시간 속에 붙들렸다. 5월30일까지.

코로나19 자가격리 동안 작업한 키스 드로잉 연작. unfucking titled (quarantine series), 2021, 종이에 올리브 오일, 립스틱, 시멘트, 84 x 60 cm 바라캇 컨템포러리 제공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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