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칼럼] 투표소로 가는 아침, 발길이 무겁다

한겨레 2021. 4. 7.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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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칼럼][2021 4·7 재보궐선거]내일자 헤드라인이 '샤이 진보의 결집, 명운을 가르다'가 될지 '성난 민심의 준엄한 경고'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누가 되든 이기는 쪽 캠프에서는 '위대한 국민승리'를 선언하며 자축의 꽃가루를 뿌릴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누가 이기든 그것은 유권자 국민의 승리가 아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일인 7일 오전 중계본동 제3투표소에서 시민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영화 <베테랑>에 나오는 돈 없고 빽 없는 형사 서도철(황정민 분)의 대사가 한때 유행어가 된 적이 있다. 이번 선거를 보면서 자꾸 그 대사가 떠오른다. 국민이 힘이 없지, 생각이 없는 줄 아나? 말로는 ‘유권자’지만 국민은 이번 선거에서 무력한 존재다. 할 말은 많지만 권한이 없다.

재보궐선거일 아침, 투표소로향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겁다. 차라리 이럴 거면 지지 후보에 기표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장 부적절한 후보에 ‘×’표를 치는 방식으로 ×표가 가장 적게 나온 후보를 선출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 내키지 않는 한 표를 행사해야 하는 처지에 자괴감이 든다. 기껏해야 몇년에 한번, 국민은 유권자로서 대접을 받는다. 정치인들은 성난 민심에 머리를 조아리고 국민의 뜻을 받들어 섬기겠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우리는 안다. 그것도 그때뿐이라는 걸. 떡볶이를 사 먹고 국밥집에 들르는 퍼포먼스도 연례행사처럼 메뚜기 한철일 뿐, 당선되고 나면 각자의 성채로 돌아가 또 다음 작전을 짤 것이라는 걸.

오늘 밤쯤이면 선거의 당락이 가려질 것이다. 언론은 앞다투어 내일 아침에 나갈 신문의 헤드라인을 뽑을 것이고 정당은 저마다 성명을 준비할 것이다. 내일자 헤드라인이 ‘샤이 진보의 결집, 명운을 가르다’가 될지 ‘성난 민심의 준엄한 경고’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누가 되든 이기는 쪽 캠프에서는 ‘위대한 국민승리’를 선언하며 자축의 꽃가루를 뿌릴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누가 이기든 그것은 유권자 국민의 승리가 아니다.

이번 선거는 알맹이가 빠졌다. 기후위기와 감염병이 만연한 시대, 고통과 희생은 가장 힘없는 서민에게 가중치의 무게로 내려앉고 계층 간 교육격차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지고 있다. ‘똘똘한 한 채’조차 가지지 못해 똘똘하지 못한 국민이 되어버린 무주택자, 원룸 거주자들에게 재건축 규제 완화와 대규모 주택공급은 먼 나라 이야기이다. 성차별 해소나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서도 양당 후보는 극히 소극적이거나 퇴행적이다. 생태전환, 주거권, 성평등 이슈에 있어 양당 후보의 공약은 소수정당이나 무소속 후보의 공약에 비해 한참 뒤떨어져 있는데 정책선거는 실종되고 네거티브 공세만 연일 뜨겁다. 그런데도 이들 양당을 진보와 보수라 이름 붙이고 국민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건 국가폭력에 가깝다.

최근 ‘사회경제개혁을 위한 지식인선언네트워크’가 펴낸 <다시 촛불이 묻는다>는 노동, 환경, 부동산, 조세정책 등에서 정부가 자가당착에 빠진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코로나와 불평등, 기후의 3대 위기가 겹쳐 있는 시기에, 압축성장의 폐해를 극복하고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국가경영의 혁신적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대기와 물, 토지를 공공재로 관리하고 주택을 재테크가 아닌 주거권의 문제로 대응해야 한다.

국민의힘은 그간 시대착오적인 개발만능주의로 이 문제를 도외시해왔고 더불어민주당은 말과 실천이 다른 어정쩡한 투스텝 행보로 사태를 악화시켰다. 서로가 ‘너 때문’이라며 책임을 전가하지만, 국민들은 안다. 둘 다 큰 책임이 있다. 도덕성 면에서도 누가 누구를 나무랄 자격이 없다. 둘 다 썩었다. 양비론은 위험하고 무책임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지를 오답1과 오답2로 만든 책임은 거대 양당에 있다. 촛불항쟁 이후 건강한 다당제와 선거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를 위성정당 창당이라는 꼼수로 무력화해 권력을 독과점한 것은 이들 양당이다.

오늘 힘없는 유권자들은 또다시 울며 겨자 먹기로 답 없는 선택지에 기표를 하겠지만 그 고통스러운 선택에 담긴 국민의 뜻을 양당은 부디 곡해하지 않길 바란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는 온갖 탈법적, 비윤리적 문제를 안고도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국민들은 그의 불법과 타락을 잊은 게 아니었다. 지난해 총선에서 민주당은 압도적 의석을 싹쓸이했지만 국민들은 위성정당 창당으로 촛불개혁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정략적 이익을 도모한 꼼수를 모르는 게 아니다.

내일 아침 신문에서는 오늘의 선거 결과를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으로 해석하는 기사를 그만 좀 봤으면 좋겠다. 민주당은 진보, 국민의힘은 보수가 아니다. 민주당은 정신 차려 ‘진보’해야 하고 국민의힘은 대대적으로 뜯어고쳐 ‘보수’(補修)해야 한다. 지금은 유권자가 권력이 없어 제한된 투표용지 안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지만, 생각이 없는 게 아니다. 알고 있다. 다 기억해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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