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美의 권력형 성폭력 사건

정지섭 국제부 차장 2021. 4. 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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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17일 서울 중구 명동의 한 호텔에서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에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자리가 마련돼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 피해자가 직접 참석해 사건과 관련해 발언할 예정이지만 언론 노출은 동의하지 않았다. /사진공동취재단

주민 6만명이 사는 미 테네시주 컴버랜드 카운티 폐기물처리과 여직원 10명이 부서장 마이클 하벨의 성폭력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은 2015년 2월부터였다. 전년도 말 부서장으로 온 하벨은 여직원들에게 강제로 입맞추거나 신체 부위를 주물렀고 옷 속으로 손을 넣기도 했다. 여성의 몸과 관련해 노골적인 말을 내뱉었고, 변태적인 자세를 취하게 하거나, 자신의 특정 부위를 만지라고 강요했다. 일부 직원에게는 인사상 특전을 내걸고 성 상납도 요구했다.

견디다 못한 직원들은 상부에 보고하고, 하벨에게 멈춰달라고 애원도 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성폭력은 2017년 11월 강간 위협을 받은 여직원의 퇴직을 계기로 그간 하벨의 행실에 관한 전모가 드러나고 경찰에 체포되면서 중단됐다. 이 사건이 국가 사안으로 부각된 것은 2018년 4월 피해자 4명이 연방평등고용기회위원회(EEOC)에 신고하면서부터다. 일부 피해자가 이후 인사상 각종 권리를 박탈당하고 엉뚱한 곳으로 발령 나는 등 보복 조치를 당했지만, 신고를 계기로 EEOC는 물론 연방 법무부 민권국 검사들이 대거 투입돼 실태 조사에 나섰다.

연방정부는 하벨에 대한 사법 처리와 별개로 피해자들에 대한 컴버랜드 카운티 당국의 조치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 성폭력 피해 직원에 대한 어떤 가이드라인이나 현장 매뉴얼이 없었고, 정부기관에 신고한 피해자에게 앙심을 품고 퇴출까지 시도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미 법무부는 컴버랜드 카운티 당국이 인종·성별·피부색·출신국·종교에 대한 편견에 근거한 차별을 금지한 민권법 7조를 위반했다고 결론 내리고 지난달 직접 국가가 원고가 돼 소송에 나섰고, 보름 만에 합의로 종결됐다. 컴버랜드 카운티 당국이 피해자 10명에게 총 110만달러(약12억4091만원)를 배상하고, 직장 성폭력 사건 발생 대비 규정을 신설하고 직원들을 철저히 교육한다는 내용이다. 법무부는 합의 사실을 공개하면서 “성폭력은 용납될 수 없으며 모든 사법 당국이 힘을 모아 발본색원할 것”이라고 했다.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피해자들의 신원은 철저히 비공개돼 알파벳 이니셜조차 등장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기 이와 빼닮은 관공서 내 권력형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지만, 전혀 딴판으로 전개됐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선거를 다시 치를 정도로 정치 지형이 흔들렸지만, 정작 피해자는 실명 노출 등 온갖 2차 가해에 시달리며 기자회견까지 열고 신변의 위협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이 사건과 관련해 어느 누구도 민·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았다. 권력형 성폭력 사건에 대한 두 나라의 전혀 다른 전개와 당국의 대처를 국력(國力)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국격(國格)의 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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