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의 책상물림]봄나물과 막걸리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2021. 4. 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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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내 일생 백 년 동안/ 쉰아홉 번째 만나는 봄/ 해와 달은 날아가는 두 마리 새/ 하늘과 땅 사이엔 병든 이 한 몸/ 소반의 보드라운 나물은 푸른 빛 돌아왔고/ 동이의 진한 막걸리 하얗게 발효됐네/ 철 따라 변하는 만물 참으로 놀라워라/ 사람의 마음도 새로워짐을 기뻐하네.” 조선 문인 서거정은 봄나물에 막걸리 한 잔 걸치며 새봄을 이렇게 노래했다. 세월은 참 빨리도 흐르는데, 매년 돌아오는 봄은 놀랍도록 새롭기만 하다.

송나라 학자 주희는 인의예지의 덕목을 술 빚는 일에 비유하였다. 발효가 미세하게 시작되어 온기가 도는 순간이 인(仁)이고, 왕성한 발효작용으로 매우 뜨거워지는 때가 예(禮)이며, 술이 완전히 익으면 의(義), 물처럼 안정을 찾으면 지(智)와 같게 된다. 하루로 비유하자면 청명한 새벽이 인, 뜨거운 정오가 예, 점차 서늘해지는 저녁이 의, 어둠에 덮인 고요한 밤의 시간이 지에 해당한다. 사계절의 운행도 마찬가지다. 만물이 새롭게 생동하는 봄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싹트는 순간인 인(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철 따라 만물이 변하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다. 이 변화가 어디에서 올까? 물은 아무리 오래 두어도 물일 뿐이다. 살아 있는 효모가 들어가야 발효가 시작된다. 모든 잎을 떨구고 겨우내 죽은 것처럼 보이던 나뭇가지, 아무런 조짐도 없이 얼어붙어 있던 땅속 어딘가에서 어느샌가 꿈틀꿈틀 고개를 내미는 것, 이러한 생의(生意)에서 인(仁)의 실체를 볼 수 있다. 변화하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다. 아무리 웅장하고 근사하게 세워져 있다 하더라도 나무 기둥은 그저 죽은 기둥일 뿐이다. 반면 비록 구석에 서 있는 작고 보잘것없는 나무라 해도 봄을 맞아 서서히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그것이 살아 있음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도 새로워짐을 기뻐한다. 옳다고 여겨온 신념에 갇혀 있을 뿐 변화를 인지하지도 못하고 스스로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 채 늘 그 모습 그대로라면, 그 사람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다름없다. 특정한 세대도, 정치 집단도 그렇다. 봄나물에 막걸리 한 잔 걸치며 살아 있음의 의미, 그 기쁨을 다시 떠올릴 계절, 봄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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