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혁명곡으로 광주 상처 치유

전지현 2021. 4. 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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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작가 리엄 길릭 광주시립미술관展
검은 눈 내리는 피아노 작품
"나만의 방식으로 광주 위로"
코로나에 일과 삶 경계 성찰
빌딩숲 압축한 추상작품 전시
영국 설치미술가 리엄 길릭. [사진 제공 = 광주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전시장에 들어서자 마자 보름달처럼 둥근 램프 20개가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관람객을 맞는다. 작품 제목 '신경망에서 감지되는 행복에 대한 기대'처럼 설레인다.

옅은 회색 전시장 벽에는 7~16m 네온 설치 작품 5점이 주황, 초록, 빨강, 파랑, 흰 빛을 발산한다. 2014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학술논문에서 제시한 '행복을 계산하는 공식'을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유럽중앙은행(ECB), 이스탄불 근대뮤지엄, 파리 북역 등 공공장소에서 이 작품을 만들어오면서 작가도 행복해졌을까.

전시장에서 만난 영국 설치미술가 리엄 길릭(57)은 "복잡한 수학 방정식의 네온빛이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행복을 계량하려는 인간의 자만심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독일 철학자 괴테가 길고 생산적인 삶의 끝에 '단지 15분 동안만 진정으로 행복했다'고 한 말을 명심해볼 가치가 있다"고 답했다.

작가의 행복지수를 알 수 없었지만 전시장 2층에서는 피아노 선율이 들려왔다. 건반을 두드리는 사람은 없고 자동 연주 장치가 작동하고 있었다. 1974년 군사정부에 대항하는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의 시작을 알린 노래 '그란돌라 빌라 모레나' 후렴구가 반복됐다. 피아노 위에선 검은 눈이 날리는 설치 작품 '눈 속의 공장(우편 배달부의 시간)이다. 혁명의 선율이 흘러나와 5·18광주민주화운동이 떠오르는 작품이다.

리엄 길릭 개인전 전경
리엄 길릭 개인전 전경
광주의 비극적 역사 자료를 찾아보고 광주비엔날레를 관람한 그는 "이 도시의 역사는 늘 의식 속에 있지만 사람들이 아는 것을 재현하고 싶지는 않았다"며 "나만의 방식으로 광주의 치유에 기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피아노를 둘러싼 쇼룸 구조물에 창틀은 있지만 창문은 없다. 가까이 다가간 후에야 유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통과한다. 코로나19와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직장과 집의 경계가 모호해진 현상을 의미한다. 일과 삶의 균형을 성찰하기 위해 이번 개인전 주제 '워크 라이프 이펙트(The Work Life Effect)'로 정했다.

팬데믹은 작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는 "집에 작업실이 있어서 큰 변화는 없었다"면서도 "국적과 세대를 초월한 다양한 만남과 여행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왔는데 이동과 방문 자유가 제한된 현재 상황이 무척 불편하다"고 했다.

국내 입국 후 2주간 자가격리 기간을 서울 한옥에서 보낸 그는 "전시 도록을 만들고 책을 읽고 요리를 하며 사색하는 시간을 가졌다"며 "3월 서울 날씨가 변덕스러워 매일이 전혀 다른 날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1층 전시장 쇼룸에는 도시 빌딩숲 풍경을 색띠로 압축한 듯한 대표작 'Fin(지느러미)'과 'Horizon(수평선)'이 설치돼 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알루미늄과 특수 페인트 등 산업 재료로 만들어온 추상 작품이다. 현대 건축물에 있는 냉각핀, 데이터 서버, 통풍구 외형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30여년 작업을 모은 이번 전시는 아시아권에서 최초로 열리는 미술관 개인전이다. 영국 골드스미스대학을 졸업한 그는 2002년 세계적 귄위의 미술상인 터너상 최종후보에 올랐으며,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대표 작가가 된 후 세계 미술계 중심으로 도약했다. 전시는 6월 27일까지.

[광주 =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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