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유희형이 쓰는 나의 삶 나의 농구 ⑥ 1970 유고세계남자농구 선수권대회
※ 본 기사는 점프볼 4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한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1969년 방콕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한 덕에 세계농구선수권 대회 출전자격을 얻었다. 1950년에 창설된 세계선수권대회는 4년마다 개최된다. 20년 만에 처음 출전하는 대회인데, 1970년 5월 공산국가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렸다. 대한항공이 없던 시절이라 대표팀은 네덜란드 비행기 KLM을 타고 알래스카를 경유, 북극을 넘어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사라진 농구공
공 두 개를 가지고 예선 대회 장소인 스플리트(현재 크로아티아)로 향했다. 아드리아 해변에 있는 스플리트는 경치가 수려하고 날씨도 쾌청했다. 서기 305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마지막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왕궁으로 유명한 관광 명소다. 당시에도 빼어난 경관이 많았지만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예선경기 후 하위리그 장소인 스코피에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산국가였던 유고연방은 도시가 어둡고 활기가 없었다. 우리가 하룻밤을 묵은 베오그라드는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호텔과 도로가 음산했고, 오가는 사람도 적었다. 그런데도 유고인들은 명랑하고 좋은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매사 자유분방하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베오그라드 시내에는 ‘티토 광장’이 있다. 선남선녀 미팅 장소다. 오른쪽은 미혼자, 왼쪽은 기혼자끼리 만나 대화하고 교제를 하는 곳인데, 미혼자는 그곳에서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커플이 많다고 한다. 기혼자끼리 만나는 것은 불륜인데 자연스럽게 교제가 이루어진다고 하니 의아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건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나라의 어색한 맞선 제도보다 이성 간의 만남이 쉽고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예선경기를 치른 스플리트는 깨끗했다. 숙소인 호텔도 3층으로 되어있는데 괜찮았다. 다만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다. 밥이 문제였다. 알이 큰 쌀을 물속에서 익힌 후 꺼낸다. 그러면 죽이 되어야 하는데 쌀알이 크기 때문에축축한 밥이 되어 나왔다. 선배들이 밥투정하며 말단인 나에게 한국식 밥을 해오라고 주문했다. 주방에 들어가 어깨너머로 배운 대로 밥을 지어 내놓았다. 밥알이 크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경기가 끝나는 날까지 밥 당번은 나였다.
호주, 캐나다, 이집트 이겼던 50년 전 한국농구
대표팀은 예선경기에서 캐나다(97-88)를 이겼지만 브라질(77-82)과 이탈리아(66-77)에 패해 탈락했다. 강호 브라질과 대등한 경기를 펼친 끝에 5점 차로 패했다. 경기 종료 1분 전에 우리가 1점을 리드했다. 속공으로 내가 림을 향해 레이업 슛(lay up shoot)을 시도할 때 블로킹(blocking)을 당했는데, 공격자 반칙을 선언한 것이다. 완전한 오심이었다. 그 판정 하나로 결국 패했다. 브라질은 결승리그에 진출, 유고에 이어 2위를 차지한 팀이다. 단신의 핸디캡을 극복하며 선전한 것에 자신감도 생겼다.
하위리그 장소인 스코피에로 이동했다. 1963년 대지진으로 1,000명 이상 사망했고, 현재는 마케도니아에 속해있는 도시다. 하위리그에서 파나마(88-91)와 쿠바(76-77)에 근소한 차이로 패했지만 캐나다(79-77), 이집트(93-73), 호주(92-79)를 이겼다. 세 팀이 동률을 이뤘고, 득실차에서 뒤져 11위를 했다. 쿠바를 이겼을 경우 13개국 중 8위를 할 수 있었다.
대회가 끝난 후, 숙소로 쿠바 선수들이 몰려왔다. 우리가 버린 농구화, 때가 절은 양말, 티셔츠 등 모든 것을 가져갔다. 어떤 선수는 모자나 싸구려 볼펜까지 달라고 애원해 줘버렸다. 쿠바를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얼마나 어려우면 저 정도일까? 공산국가는 왜 가난할까? 1984년 LA올림픽 여자농구 예선경기가 쿠바에서 열렸다. 한국 선수단 임원으로 쿠바 아바나에 2주간 머물렀다. 그때 그 나라의 현실과 실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똑같이 급여를 받는다. 국가가 주는 월급으로는 겨우 끼니만 때울 정도다. 채소 파는 곳과 빵 가게 앞에 수십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신선한것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다. 사는 집도 자기 소유가 아니다. 깨끗하게 관리할 이유가 없다. 모든 주택은 낡았고 흉물스러웠다. 도로에 달리는 차는 1950년대 미국에서 만들어진 고물차 들이다. 모두 평등하게 잘 살게 한다는 것은 허구다. 특권층은 잘 산다. 일반 국민은 매일 식품 가게 앞에서 무한정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었다. 유고라는 나라도 못 살기는 마찬가지다. 티토 대통령이 강제로 여섯 나라를 점령, 유고연방을 만들었지만 당시의 생활 수준은 형편없었다. 각 나라가 독립한 지금은 관광수입 등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경기를 모두 마치고 귀국길에 로마에 들러 관광을 했다. 로마에서 호랑이 전무이사로부터 또 혼이 났다. 이탈리아는 스파게티가 유명하다. 레스토랑에서 스파게티를 먹어 보기로 했다. 종류가 너무 많았다. 하나를 찍어서 주문했는데 괴상한 것이 나왔다. 냄새가 역겨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전원이 젓가락을 놓았다. 스파게티가 담겨있는 접시를 냅킨으로 덮어놓고 나가려는데 그분이 들어왔다. 남긴 음식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한 끼를 굶어야 했다.
1949년 3월 10일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했다. 송도중 1학년 때 농구를 시작해서 송도고를 거쳐 전매청에서 민완 가드로 활약했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남자농구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1969년 방콕 아시아선수권대회와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한국남자농구 우승 주역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다. 남자농구 명가드 계보를 열었던 그는 1978년까지 대표선수로 활약했고, 은퇴 후에는 관계로 입문, 문화체육부와 월드컵조직위원에서 체육행정가로 매끄러운 일솜씨를 발휘했다. KBL 출범 후에는 심판위원장과 경기이사를 역임했다. 1984년부터 1997년까지 KBS해설위원을 맡아 해박하고 명쾌한 입담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양대 겸임교수와 마천청소년수련관장도 지냈다. 만년(晩年)에 글을 쓰는데 재미를 붙였다. <수필춘추> 2020년 가을호에 응모한 ‘스승을 만나다’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수필가로 데뷔했다.
# 사진_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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